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우리 지역은 섬이라는 지리적인 특징으로 예부터 웬만하면 집안에 배를 모으거나 배를 타거나 배를 소유해서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가족이 한둘 있기 마련이었다. 어디 식구들만 그러한가, 선후배나 친구 중에도 이른바 뱃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선박제조사들이 도시를 견인하고 있으니 이들 중 어느 회사에라도 속해 있다면 대단한 자랑거리가 되고 특정회사의 사원복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 미혼 남녀의 경우 결혼정보업체의 주요 고객으로 전문직을 능가할 정도라 하니 우리 도시에서의 신 뱃사람은 개인에겐 꿈이기도 하고 생활이기도 하며 도시에겐 색깔이자 도시경쟁력으로서 미래로 끌어 주는 희망의 문이기도 하다.

장승포에 있는 거제문화예술회관의 외관을 보면 남쪽바다를 향해 항해를 준비하는 범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건축미로 인해 미항 장승포와 함께 예술회관을 찾는 방문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데, 공연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재밌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로마시대에 야외 원형극장으로 출발한 공연장은 중세시대까지 귀족과 종교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공연장에는 일반인들이 함부로 들어가 관람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연 제작에 있어서도 요즘 같으면 배우나 가수 같은 출연자부터 전체적인 기획과 대본 등 소프트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가 이들 상류층에 의해서 이뤄졌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는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로 이 시기는 르네상스의 신기술과 사상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는데 당연히 조선술과 항해술이 급속도로 발달했고 이런 교역의 활성화로 인해 신흥 자본가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대자본을 형성한 이들에게도 넘지 못할 벽이 있었으니 바로 극장 출입이나 공연관람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돈으로 대체되지 않는 신분의 구분이 바로 공연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당시로선 간혹 이루어지는 공연물이 상당한 유희거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되었으니 아쉬울 게 없는 신흥 부자들에게 공연분야는 대단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시대가 쇠퇴하면서 뱃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될 처지에 놓이는데 선주들은 이들을 육지로 불러 들여 공연장 건설에 투입시키게 된다. 간간히 공연제작비를 후원하며 그 대가로 귀족처럼 공연을 관람하던 자본가들 입장에선 본인 소유의 극장을 가지고 싶은 욕망과 업계의 위기를 조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면 승무원들을 크루(Crew)라고 부르는데 요즘도 공연장에서 무대 스탭들을 크루라고 하는 연유가 여기서 비롯됐다.

크루의 공연장 진출은 단순한 이직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선박제조 기술은 고스란히 공연장제작에 기술적 이식을 가져오게 됐다. 극장의 플로어나 덧마루는 갑판에서, 각종 무대막들의 설치와 사용은 범선의 돛에서 그 원리나 기술들이 옮겨 왔으니 오늘날 공연장의 할아버지는 선박인 셈이다.

언젠가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는데 드레스리허설을 하던 중, 내려간 오케스트라피트가 기계고장으로 작동이 되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대로 두면 저녁 공연을 못할 지경이고 복구할 수 있는 시간은 4시간 정도 주어진 상황. 수소문 끝에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긴급히 투입된 인력들은 다름 아닌 목선을 만들던 인근의 조선기술자들이었다. 해프닝치고는 기막힌 필연이 만들어 낸 반전이었다.

거제는 크루의 도시이다. 그들로 인해 도시로서의 규모를 갖출 수 있었고 그들로 인해 도시의 자긍심을 유지하고 있다. S사의 감사가 너무 길고 디테일해서 지역 경기까지 위축된다하여 감사를 조기 종결해 달라는 읍소까지 하는 마당이니 우리 도시는 진짜 크루의 도시가 맞는 게다.

거제는 대항해시대의 위기가 공연장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그 옛날 유럽인들의 창의와 반전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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