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거리에 나붙은 당선과 낙선의 사례가 왠지 아직 끝나지 않은 다음 경기를 예고하는 듯 더욱 치열해 보인다.

단체장이 취임을 하고 의회가 구성될 때까지 당선인들은 시민이 보여준 민심을 천심으로 여겨 빈틈없이 준비를 해야 하는데,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선거 기간 동고동락했던 주변인물들일 것이다.

이들의 처세에 따라 당선인의 향후 4년간 성패가 반쯤 가름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을 우리는 이미 많이 보아 왔지 않은가.

바로크 음악의 거장 헨델(1685~1759)은 처세의 대가였다고 알려져 있다. 같은 해에 태어나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함께 음악의 어머니로 불린 헨델은 '메시아'의 작곡가라는 이유로 매우 경건하고 아폴론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바흐가 생전에 크게 빛을 보지 못한데 반해 헨델은 음악적 재능을 출세에 이용할 줄 알았다. 독일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영국 왕실의 궁정 악장으로 발탁돼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그 영리함을 짐작할 수 있다.

독일 하노버 왕조의 선제후인 게오르규의 전속 악장으로 일했던 헨델은 대단한 야심가였다. 큰 꿈을 이루고 싶었던 그는 선제후에게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자작 오페라를 상영하고 영국 앤 여왕의 생일 축하곡을 작곡해 총애를 받게 된다. 이런 행운에 도취된 헨델은 게오르규의 귀국 명령에 불복하고 영국에 계속 체류하다 아예 영국인으로 귀화해 버려 게오르규의 노여움을 샀다.

그런데 얼마 후 천년만년 살 것 같던 앤 여왕이 갑자기 타계하자 게오르규가 외가의 적통을 받아 영국 국왕 조지 1세에 즉위하는 기막힌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속된 말로 줄을 잘못서도 한참 잘못선 것이다. 당연히 새 국왕은 헨델의 연금 혜택을 박탈하고 상류사회에서도 방출했다.

그러나 헨델은 집요했다. 1717년 6월 템스강에서 거행된 왕의 즉위 축하연에 몰래 배 한 척을 띄운다. 이 배에 50여명의 관현악단을 태워 자신이 만든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관현악 모음곡 '수상음악(Water Music)'이다.

서른 두살, 헨델의 영악함과 음악성이 금관악기를 통해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듯 울려 퍼진 것이다. 뱃놀이를 하던 국왕은 강가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이 음악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작곡가를 수소문하게 되고 그가 헨델인 것을 알게 된 왕은 노여움을 거두고 다시 궁전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고 지위도 복권시켜 주었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수상음악'은 '왕궁의 불꽃놀이'와 더불어 헨델의 걸작으로 꼽힌다. 악기의 편성이나 곡의 배열이 탁월하고 내용도 창의적이다.

한편 조지 1세는 당시 유럽의 복잡한 혼맥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하노버왕가의 창시자가 되긴 했지만 독일에서 성장하는 바람에 영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 영국왕이 영어를 못한다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인해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가 확립되고 내각책임제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도 되새겨 볼 만한 장면이다.

왕이 되긴 하였으나 여러 가지 상황이 제대로 된 리더십을 구사하기 힘든 상황, 이런 조지 1세의 불편한 마음을 헨델은 누구보다 잘 읽었는지 모른다.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수상음악'은 그래서 조지 1세의 맘을 녹이고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아침을 열어 주는 명곡이 되었다. 헨델은 그래서 시대를 뛰어 넘은 처세의 달인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특정 정치인을 두고 처세에 달인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시류에 따라 이곳저곳을 옮기는 정치인은 많지만 어떤 이는 처세의 달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철새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선출직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외로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야 하는 일이 그리 만만하겠는가? 승자나 패자나 지금쯤은 내상이 깊을 것이다. 주변인들의 처세는 이들을 진심으로 위무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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