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민 칼럼위원

▲ 이용민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전국적으로 지방선거의 대진표가 속속 확정되고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그것은 선거가 공동체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내재된 가치를 정돈하며 나아가 다가올 미래의 여러 가지 이상들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속시원한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 발원돼 17세기 유럽에서 진화의 과정을 겪으며 오늘날 대의제의 골격으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선거가 공동체 번영을 위해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지에 대해선 일부 회의론이 존재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선거는 경쟁을 전제로 한다. 경쟁에선 이른바 룰이 제일 중요하다. 똑같은 길이를 뛰게 해야 하고 동일한 조건의 도구를 사용하도록 해야 하며 휘슬에 맞춰 같은 시각 뛰쳐나가게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룰이 흔들리면 게임은 흥미를 잃고 종국엔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1974년, 현재 서울시향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명훈이 당시엔 지휘자가 아닌 피아니스트로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국력과 예술교육이 전반적으로 척박한 시절이라 국가적 경사라 여겨질만 했던지 대대적인 환영 카퍼레이드까지 펼쳐졌었다. 

우리의 압축성장시대에 경제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분야의 성장이 병행됐지만 클래식음악계의 약진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 대한민국은 '콩쿠르 선진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95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유네스코 산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속한 메이저콩쿠르에서 300여 명이 넘는 한국 연주자들이 파이널에 진출했고 70여 명이 우승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이제는 유학가지 않고 국내에서만 공부한 클래식 영재들이 클래식음악 종주국에서 개최되는 쇼팽콩쿠르·차이코프스키콩쿠르·퀸엘리자베스콩쿠르·ARD콩쿠르 등과 같은 세계 최고의 경연무대를 석권하는 쾌거를 이뤄내고 있다.

언젠가 유럽에서 개최된 WFIMC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일정 중 회원콩쿠르의 자격을 거론하는 시간에 차이코프스키콩쿠르가 연회비를 3년째 내지 못하고 있어 퇴출위기에 놓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워낙 대단한 콩쿠르이다 보니 유예기간을 주고 구제하긴 했지만 퍽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이제는 국적을 넘어 문화상품인 콩쿠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까지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차이코프스키콩쿠르가 그러하다.

러시아의 재정이 어려울 때 일본 악기 메이커인 야마하가 크라운스폰서로 참여하게 됐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영향력이 커져 거의 주최기관 수준의 위상을 가지게 됐다.

당연히 야마하의 시장점유나 브랜드제고 또는 일본 국적 연주자들에 대한 서포터가 도를 넘으면서 차이코프스키콩쿠르의 권위나 영향력이 예전같지 않게 됐다. 음악콩쿠르는 음악으로 진검승부를 해야함에도 그렇지 못했던 탓이다.  

작곡가 벨라 바르톡은 "시합은 달리는 말들이나 하는 것이지 예술가들이 할 만한 것은 못된다"라며 음악가들이 콩쿠르라는 경쟁을 통해 등용되는 구조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바르톡의 말 한마디에 콩쿠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리 만무하다.

콩쿠르는 오랜동안 음악이나 무용, 연극 같은 공연예술은 물론이고 문학이나 미술같은 순수예술 장르에서도 우수한 신인의 등용문으로 각광 받아온 제도이다. 늘 잡음이 뒤따를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함이 있지만 그래도 본질인 음악에 집중하며 차세대 거장들을 발굴해 내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이 역설했듯이 참가 자체로써 충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올림픽정신은 콩쿠르에도 필요하고 선거에도 적용된다. 아니 우리 삶 전체에 필요한 덕목이다.

물론 들여다 보면 말처럼 쉽지 않은 현실에 절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경쟁이 수반하는 통과의례이고 나서서 겨루거나 심판받는 자의 몫이라면 열심히 준비한 만큼 쏟아부으면 될 일이다.

레이스 자체가 아름다우면 우승자 뿐만 아니라 모두가 승리자가 된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 신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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