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원 칼럼위원

▲ 윤성원 거제불교거사림 2기 학생회장
부처님 오시는 날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고운 연등이 우리의 마음에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이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야 할 아이들을 세월호 속에 묻고 소리쳐 우는 산자의 아우성을 우리는 듣고 있기 때문이다.

절집 마당에 하나둘 늘어가는 연등은 세월호의 영가들이 극락왕생 하기를 바라는 모두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같아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우리에게 부처님이란 스승만큼 중요한 존재는 없다.

道(도)를 구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스승과의 인연은 시작된다. 스승의 가르침이 삶의 원동력이 되고 부족한 나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게 된다.

모르는 자는 도를 깨달아야겠다는 원력중생과 세상을 건져야겠다는 원력실천으로 스승들의 길을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을 흠모 하는 이들도 많아지는 것이고, 민들레 꽃씨처럼 흠모가 사방으로 퍼질 때 예토가 정토가 되고 천년 고목나무에 사죄의 꽃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그 사죄의 꽃에는 감정이나 색깔이나 맛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 된 가르침에 혼용되어 개인 감정이 곧바로  사회에 큰 바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부처님 법의 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소리로만 살아가려는 답답한 세상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도 따지고 보면 자기만의 이기에 빠져버린 탓이다. 선장이라는 사람은 모든 의무와 책임은 팽개치고 자기만 살겠다고 남보다 먼저 탈출하던 그 모습을 보면서 불신은 분노처럼 일었다.

선장은 배의 스승됨을 포기하는 순간이었고, 학생들은 움직이지 말라는 스승의 말을 순종한 훌륭한 제자였기에 오히려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기본질서가 무너지고 법과 원칙이 사라진 엉망의 세상이 되었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헝클어 놓았는가. 그건 바로 부처님의 법을 소홀히 하면서부터다. 부처님의 법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의 법이 앞서고 인간의 생각이 앞서고 인간의 이기가 앞선다.

지금부터 1004년 전 중국 송나라 때의 도언(道彦)이 석가모니 이래 여런 조사(祖師)들의 법력과 법어를 모아 엮은 불교 서적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불두착분(佛頭着糞)'이란 말이 있다.

그 어원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상공이라는 사람이 한 절에 갔다가 참새가 불상머리 위에 똥을 싸는 것을 보고 주지스님에게 물었다.

"참새에겐 불성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놈들은 부처님 머리에 똥을 쌉니까?"
"그럼 저놈들이 왜 독수리 머리에는 똥을 싸지 않을까요?"

참으로 의미로운 일화다. 언제나 위에 있는 자는 아래를 향해 똥을 싸고, 자기보다 강한 자의 머리에는 똥을 싸지 못하면서 힘없고 약한 자 앞에서는 거들먹거리면서 법같은 것은 지키지 않는 것이 대범한 것이고, 자신의 능력처럼 여기고 있다.

'불두착분'의 세상에서 부처의 법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욕심내지 말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 보인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상태에서 가식적으로 표정만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다.

부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정신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자유가 우리를 편안케 할 것이다.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순리에 순응하고 삶의 의미를 잊지 않게 된다.

부처님 오신 날,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켜둔 연등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속에 세월호가 가져다준 아픔이 담겨 있다. 행복해야 할 불빛속에 서린 슬픔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불빛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소리없이 타고 있는 연등 아래서 세월호의 영령들에게 사죄한다. 모두 우리 탓이라고, 부처의 법을 잊은 우리 모두의 탓이라고…. 그 때도 연등은 소리 없이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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