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희 계룡수필 회원

겨우 숨을 돌린다.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온 몸이 젖도록 이리저리 뛰다보면 어느 새 저녁이다.

침이 마른다. 입에서는 단내마저 난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다. 무슨 일을 먼저 하고 빨리 마무리 지을 것인가 생각해본다.

가족에게 있어선 난 주연(主演)이다. 그러나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함이 없다. 남편도 아이들도 무슨 일이든 내게 미룬다.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언제든 나서길 바라고 기대를 한다. 그래서 난 늘 바쁘면서도 그들로부터 보내오는 메시지를 거부하지 못한다.

요구사항도 많다. 어떤 땐 어느 한쪽에 숨어 주연 자리를 벗어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있다.

그런데 전부 싫지는 않다. 그들이 못해서 쩔쩔매는 일은 내가 나서야 하니까. 해내는 일에 식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면 나는 어깨에 힘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일들을 처리하기에 바쁘다. 쌓인 빨래도 다림질해야 하고, 김치도 담가야 한다.

어느 정도 추스르고 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한 구석에 놓아둔 화분이 눈에 띈다. 말라비틀어진 채 흙덩이만 끌어안고 있다. 주인의 손길을 애절히 기다리다 지쳐 말라간 것이다. 못내 미안한 마음에 꽃집으로 달려간다. 비어 있는 화분을 채우기 위함이다.

꽃집은 각양각색의 나무와 예쁜 꽃들로 가득하다. 날 기다렸다는 듯 은은한 향기를 뿜어낸다. 자태도 곱다.

꽃집이 이래서 좋은 건가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온갖 시름 다 잊어버리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잃어버려가던 정서를 다시 갖게 하고 바쁜 중에도 여유를 갖게 한다. 뭣 하러 이곳에 왔는지도 잠시 잊어버린다.

아름다운 꽃에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눈을 감고 진한 향기를 맡는다. 강하지만 신선하다.  주문을 받은 꽃바구니가 주인 손에서 거의 완성되어 간다. 장미꽃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꽃인데, 정말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화려하고 탐스럽다.

그런데 장미를 둘러싼 안개꽃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온다. 안개꽃은 화려하지 않다. 강한 색깔로 자랑하지도 않는다. 한 줄기에 여러 꽃송이가 달려 있음에도 시기하지도 않는다.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안개꽃이 마음에 와 닿는다. 평상시엔 예쁜 줄 몰랐는데. 수수하다. 자꾸 눈길이 간다. 보면 볼수록 끌린다.

그러고 보니 안개꽃이 꽃집에선 약방의 감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꽃에 잘 어울린다. 그래서 장미와도 화합하고, 카네이션과도 잘 어울렸구나 싶다.

사람들은 매혹적이고 정열적인 장미가 되고 싶어 한다. 나 역시도 화려한 장미이고 싶다.  그런데 오늘 보니 장미를 감싸주는 안개꽃의 은은함도 멋스럽다. 안개처럼 조용히 수더분한 얼굴로 장미를 둘러싸준다면 그 역할도 괜찮지 않은가.

어떤 꽃과도 조화를 이루는 안개꽃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드러나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분해하지도 않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조연처럼 살아가는 그런 삶.

안개꽃처럼 살아가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한 주역도 정말 빛나지만 그 주연을 위해서 한걸음 뒤에 물러서서 살짝 미소를 보이는 조연도 아름다운 삶이란 생각이 든다.

난 여태 내가 주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연이었다.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 자식을 보살피며 어머니라는 역을 맡은 조연이었다. 남편과 아이들 뒤에 가려진 나, 내가 그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마음이 모처럼 날아갈 것 같다. 만사를 제치고 오늘은 한 다발의 안개꽃을 가슴에 안고 집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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