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자오선 - 코맥 맥카시 作

▲김승범 대학생
누구에게나 현실과 세상의 비정함에 몸서리치게 되는 시기가 있다.

밝고 행복한 모습들로 가득한 TV 속 이미지들이 뿌려놓은 안개에 젖어 그런 세상에서 그런 삶을 꿈꾸던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 그 순간 더 이상 세상은 착하고 따뜻한 곳이 아니며 어느새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 공허하게 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핏빛 자오선'은 핏빛이 낭자한 책이다. 19세기 중후반 미 서부와 멕시코를 넘나들며 인디언은 물론 여자와 어린아이도 서슴지 않고 죽이던 무법자들의 시대 광경이 펼쳐진다.

놀랍게도 작품 속 그려지는 학살은 허구나 과장이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전쟁이 끝난 후에도 비정규 군대들이 인디언 현상금을 타기 위해 인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여 머릿가죽에 인디언 깃털을 꽂아 팔아넘겼던 것이다.

잔인하게도 열다섯도 되지 않은 한 소년이 이런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 던져지고 소설은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는 곳에서 성장하며 이를 목도하는 소년의 시선을 따라간다.

이 책은 인간 내면에 분명히 자리하는 폭력성과 잔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전쟁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 도덕의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작가는 건조한 대사와 줄줄 이어지는 만연필체의 장면 묘사를 적절히 혼용해 마치 성서와도 같은 분위기를 형성해낸다. 소름끼칠 정도로 차갑게 묘사되는 현실 속 유일한 한줄기 희망과도 같던 소년이 작중 '판사'와 조우해 대결하는 종극의 구도는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작품 속 '판사'는 전쟁과 죽음의 화신, 즉 세상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인생의 꿈이 꺾이고 몸까지 탈이 나 난생 처음 오랫동안 병실에 입원해 있을 무렵, '핏빛 자오선'이 내게 찾아왔다. 다른 시대, 다른 세상의 이야기지만 이후 내 사고를 변화시켰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작권자 © 거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