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논설위원

윤일광 논설위원
이게 도대체 겨울인지 봄인지 헷갈린다. 3월 초의 날씨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요즘 같으면 봄이 오기도 전에 초여름으로 바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이럴 때 떠오르는 것이 중국 역사상 4대 미인 중의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의 시 한 구절이다.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전한(前漢)의 원제(元帝)는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후궁 한 사람을 추장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하는데 여탐이 많은 왕은 후궁 중에서 가장 못생긴 여인을 보낼 생각으로 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한다.

후궁들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써가며 예쁘게 그려 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왕소군은 자기 미모만 믿고 뇌물을 쓰지 않자 괘씸하게 여긴 모연수는 실물보다 훨씬 못생기게 그렸다.

못생긴 초상화 탓에 왕소군이 선택되었고, 그를 시집보내는 날 실물을 본 원제는 가슴을 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화가 난 원제는 모연수를 처형하고 말았다. 흉노의 추장에게 시집간 왕소군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이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고 봄이 봄 같지 않는 게 어디 날씨뿐이랴. 헷갈리는 일이 어디 한둘이랴. 인문학의 위기라고 소리치는 대학일수록 수강생 탓하며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문학과 철학과 역사과를 주저 없이 폐강시킨다. 사람의 품격은 경제가 아니라 문화의 수준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일수록 제 돈 주고 책 사보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서점은 하루에 하나 꼴로 폐업되는 걱정스런 나라다.

내가 잘 아는 서예가 한분은 요즘 큰 고민에 빠졌다. 수입이라야 서실(書室)을 경영하면서 들어오는 수강료가 전부였는데 서예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수강생이 줄어들어 결국 폐업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늘었다. 주민들의 문화적 수준을 올린다고 동(洞)이나 면(面)마다 자치대학을 개설하고 서예강좌를 무료로 연 탓이다. 공짜로 배워 준다는데 바보처럼 누가 비싼 돈 주고 서예학원으로 가겠는가?

문제는 가르치는 사람들의 수준이 문제인데 서예학원에서 사오년 배우고 나면 한석봉이라도 된 것처럼 남을 가르치겠다고 나서니 그게 문제다. 거기다가 그 흔한 상(賞)이라도 하나 받으면 그 때부터는 가르친 스승도 제치고 대가의 반열에 서서 우쭐거리며 자기를 불러주는 곳이 없나 하고 기웃거린다.

글씨만 그러랴. 등단을 나이라고 치면 아직 걸음마 단계인데도 문학단체 장(長)을 탐하고 모임의 상석을 탐내고, 신문에는 자기 이름을 딴 시평을 겁도 없이 펼쳐 놓는다. 문학을 앞세워 인생의 깊이를 논하기보다는 청중의 인기에 빠져 웃고 떠들다가 강연료만 챙겨가는 시인과 작품보다는 짧은 몇 마디를 퐁당퐁당 던지는 트위터로 존재감을 알리고 싶어 하는 작가들이 봄을 헝클어 놓는다.

역사교과서는 왜 이렇게 소란한가?
오늘의 역사는 오늘 결론을 낼 일이 아니다. 지금은 기록만 남기면 된다. 기록자는 자기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고집해서는 안된다. 세상은 늘 50:50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기 생각만 옳고 자기편만 편들다 보니 반대편의 주장을 위협과 협박으로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공존하는 사회, 다양한 주장들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기에 그건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역사교육은 역사책 팔아먹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더구나 교과서의 채택권은 학교에 있는데 왜 학교 바깥에서 패를 나누어 시위하고 닦달질일까.

종교와 정치는 이혼한지 오래인데도 전국을 돌며 정권퇴진을 외치는 신부님들, 개인정보가 줄줄이 새어나가는 신용 없는 사회. 말만 선택진료지 선택권이 거의 없이 덤터기 쓴 것 같은 기분만 남기는 괘씸한 병원,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의 마누라, 아들. 시어머니에 사돈까지 온 식구가 줄줄이 나와 남의 집 집안 행사 같은 프로그램을 보아야 하는 이 짜증스러움. 뭐 하나 봄 같은 게 없다.

이 봄을 어찌할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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