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석 칼럼위원

▲ 이아석 남해안시대포럼 의장
한 겨울이 되면 저 북중국과 시베리아로부터 시작된 칼바람이 거제의 앵산을 중심으로 고현만을 파고들어 삶에 찌든 분진들을 바다로 데려간다.

한동안은 바람이 그 칼날을 세우기 위해 중국 대륙 중원의 온갖 더럽고 해로운 것들을 보내오는 바람에 때로는 화가 치밀고 방풍 장치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어렵다는 위기감마저 엄습했다. 한마디로 고약한 이웃을 둔 팔자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수 세기를 침공과 약탈을 일삼아 치를 떨게 만들었던 세력들이 이젠 제 방에 해묵은 온갖 독기와 먼지를 옆방으로 불어대고 있으니, 말이 방이지 벽조차 없는 속수무책의 처지를 대체 어찌 해야 하는지 답답하다.

대국의 위세에 눌리거나 스스로 사대인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위정자들은 지금 그런 엄청난 재난의 환경을 두고도 입도 벙끗하지 않고 있다. 내년 바람이라도 다시 맞으면 그땐 무슨 마스크를 찾을 지 궁금하다.

바람을 쫒아 내려가면 동서로 가르고 둘러 선 계룡산과 선자산 북병산과 노자산을 지나면서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 땅의 행정관리들은 적어도 반쪽만은 자연을 온전히 보존하여 동서로 가른 산맥의 남쪽을 개발하거나 파헤치는 일을 삼가왔다.

칼바람이 날아드는 서북 관문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이룬 도심의 행태들이 마치 양지를 두려워하는 눈꽃처럼 음지에 하얗게 번져있는 모양이다.

함께 바람을 쫒아가는 일행이 이쪽 출신 정치인들이 대부분이고 어쩌고 하는 해설은 가당치도 않을 것이고, 남쪽과 양지만은 보존하자는 분들의 놀라운 지혜에 감탄할 따름이다.

남으로 가라산 줄기를 따라가면 다도해를 여는 경관이 기다리지만 남쪽의 망산과 서쪽의 삼방산으로 갈라지는 풍광은 언제 봐도 일색이다.

더러 눈치없는 바람이 칼날을 세우고 골짜기의 온기를 찾아 마실을 다니지만 아무래도 남도의 정취와 인심은 계룡산 남쪽 품안을 좌우로 가슴을 열고 있다는 느낌이다.

가파른 듯 버티고 선 천장산에서 배낭을 풀고 멀리 태풍의 방파제처럼 버티고 엎딘 대마도를 바라보면서 저길 관리하겠노라고 오가며 수중원혼이 되어버린 수많은 선조들의 아우성을 들으면서 바람이 달려가는 남녘을 본다.

지금 이 생각의 끝이 지나면 한 해가 저물 것이다. 대마도 뿐만이 아니라 근해 홍도의 상공까지 줄을 그어대는 버릇없는 것들을 나무라고 단죄하지 못하는 이 땅의 한심한 위정자들은 이 시간에도 한강변의 모래구덩이 위에서 남북과 남남을 다투느라고 여념이 없다.

가화만사성을 실천하는 중인지, 오직 배운 노래라고는 독도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기야 그런 가수들은 이 삼천리 강산에 수두룩하다. 노래방은 많은데 18번들이 너무 단조롭다. 고함을 질러대지만 박자가 맞지 않는다.

해가 가기 전에 연습들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비평이 많다. 해가 바뀌고, 나이는 칠순을 넘길 참인데, 아직도 철들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건 어른이 없는 사회의 비극이다. 필자도 어김없이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해방 전후의 혼란이 아직 구호 그대로 부딪치고, 천 번에 가까운 국난을 당했어도 여전히 제 모습을 추스르지 못하는 나라, 도처에 대안 없는 구호를 외치는 투쟁꾼과 아첨을 일삼는 환관들이 설치는 나라는 이제 좀 철들어야 한다.

적어도 새해에는 좀 철 든 사회를 위한 철학을 가다듬고 배우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연고를 빌미로 제 고장의 섬을 반쪽 내어 대접해 온 치졸한 지방 정치꾼과 관리들도 시린 바람 속에 배낭을 메고 이 가파른 산길을 걸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삶을 공정하게 꾸려 갈 터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가꾸어야 하는지 마음의 지도를 펴고 앵산에서 망산으로 달려 보아야 한다.

설혹 이것이 세모가 주는 푸념으로 바람과 함께 날려 버릴지라도 지금 심상찮게 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사납고 시린 바람 속을 함께 걸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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