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자 계룡수필 회원

전래동화에 ‘노인을 버리는 지게’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서 감상문을 쓰게 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부모를 버린다는 대목에서만큼은 야무지게 한마디씩 한다.

“어떻게 자기 부모를 버려요?”

야단법석인 이슈가 되고 있는 현대판 고려장이야기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신문과 각종 매스컴에서 들려주는 세상이야기가 정겨운 일들로 가득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일들도 더러 있으니 편한 마음은 아니다.

잠시 한 여인을 떠올린다. 아직도 세상 한편에는 아름다운 사연이 숨어 있음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위안이 되고 나를 채찍질하는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며칠 전 지인의 집에 다녀왔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것도 중풍과 치매로 꼼짝 못하는 시어머니를 팔 년째 섬긴다.

아파트 구조를 보니 방 두 개에 부엌과 거실이 전부다. 어른을 모시고 살기엔 넓이도 그렇고, 여러 모로 불편해 보인다. 시어머니가 안방에 계시니 그녀의 방은 어딜까.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거실 한쪽에 쳐진 커튼을 가리킨다.

씽긋 웃는 얼굴이 언제 봐도 여유롭다. 냄새로 얼굴을 찡그릴 만도 하건만 어린 제 자식 기저귀 갈듯 쓱싹 해내고, 부드럽게 만든 간식을 삼키기 좋도록 양도 잘 맞춘다.

텔레비전 채널도 이리저리 바꿔주고, 욕창이 들까 이쪽저쪽 돌려가며 몸을 주물러준다. 보통 일이 아닌 것을 설렁설렁 참 쉽게도 한다. 노인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 평소에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씻기고 닦아주었는지 알 것 같다.

노인의 얼굴엔 구김살이 전혀 없다. 구박대기였다면 인상부터 달랐을 것이다. 어딘가 모르게 찌들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을지 모른다. 정신을 놓고서도 며느리 없으면 안 된다며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어지간한 마음으론 해낼 수 없을 터이다. 병 없이 지낸다면 얼마나 편할 일인가.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편하게 생각하기에 늘어난 게 체중이라며 뱃살 잡는 시늉을 한다. 바라보는 사람이 오히려 힘들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지, 그런 마음은 애당초 갖지 않은 사람이다.

한두 달도 아닌 수년을 병 수발 드느라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흔히 하는 계모임도 끊었을 것이고, 부부 동반외출은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다.

잠시 잠깐 시장 봐오는 것도 신경이 쓰여 허둥지둥 돌아가기 바빴다. 며느리인 자신만을 찾는다는 것에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늘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모든 걸 묵묵히 받아들인다. 살아가면서 지치지 않는 원동력은 있는 그대로를 다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재어보고 따졌더라면 아마도 몇 달 못 갔을 것이고, 가족 간의 우애도 깨졌을 것이다. 당신 한 사람이 짐을 짊어졌으니 다른 사람이 다 편하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감상문을 써내려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읽는다.

이 다음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의 이 눈망울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아이들의 눈망울이 그대로이길 바라기 전에 먼저 내가 그런 눈빛을 보여야 하는 것이 우선일 게다.
아이들과 똑 닮은 그녀의 웃음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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