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담 스님(금수사 주지)

어느 여성시인은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하나 둘씩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엇이 여자들을 화장하고 아름답게 꾸미게 만들까? 인생과 젊음 이 자체가 아름다움인데 화장하고 수술하며 보톡스니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애착심을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애착심 혹은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집착에서 생긴 것이다.

태어나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하기 마련이다. 그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뿐이다.

불교에서는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고 한다. 즉 변화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변화의 중심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더 더욱 어려운 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다.

한시간전에 이야기 해 놓고 전혀 그런 일 없다고 시침을 떼면 미치겠다, 돌겠다, 팔짝뛰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음은 실체가 없어서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마음이란 실체를 확인할 수가 없다.

한시간전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 헤라크라이온스는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고, 공자는 가는 것이 물과 같구나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두 철학자의 말은 모두 끝없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삶에 대한 정의이자 통찰이다.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변하고 공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색상과 형상을 유지한다.

우리가 변화를 인식하는 방법은 어떤 존재가 지난 색상과의 인식과 존재의 공간적 이동 과정을 통해서다. 사람이 육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색상의 수는 수백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많은 색상은 캄캄한 암흑속에서는 흑과 백 두가지만 환원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색상은 존재일까 비존재일까? 물리적으로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니까 존재라고 할 수 없지만 사물을 인식하게 하는 점에서 존재가 아니라고 할수도 없다.

현대 신과학에서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퀴크’라고 한다. 퀴크 역시 빛이며 에너지며 파동이라고 한다. 즉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모든 존재가 공(空)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가 모두 변한다는 명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멸집(滅集)을 배워야 한다. 즉 모든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모든 고통은 변화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항상 새롭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변화의 인식 위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창출해야 된다.

변화가 나쁜 것이 아니다. 변하기 때문에 오늘 나의 삶이, 나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재벌 회장이 자기 아들의 작은 폭행에 경호원과 회장 자신이 보복폭행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근대적인 개발독재와 군부독재의 구태의연함에 안주하여 현실의 변화를 느끼지도 못했고 변화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화를 하지 못하면 시대에 역행하게되고 퇴출될 것이다.

자 우리 모두 긍정적으로 변화를 꾀하여 시대의 선각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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