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옥례 계룡수필 회원

구속이 없는 절대 자유로운 경지에 노니는 것을 ‘소유요’라고 한다.

장자(莊子)는 이욕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비웃으며 도의 세계, 초월적인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 북녘 바다에 붕(鵬)이라는 새가 살고 있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파도를 일으키기를 삼천리,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를 구만리, 그런 뒤에야 유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 -

이는 장자(莊子)의 ‘소요유’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지를 박차고 무한한 허공으로 날아올라 드넓은 창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아주 보잘것없이 보일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오르기 힘들다하는 험준한 산맥도, 한 없이 깊고 넓은 바다도 하나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이처럼 작게 보일진대 우리 인간 개개인은 넓은 우주에 먼지로나 보이려나.

우물 안 개구리마냥 내 안에 갇혀 사소한 일에 울고 웃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매달려 슬퍼하고 절망하고 좌절했던 모습들.

대붕이 대지를 박차고 무한한 허공으로 솟아오르듯 내 안에서 탈피해 좀더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가슴 속에 뒤엉켜 있는 감정의 분진들을 허공으로 날려 버린다면 내게서 좀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장자는 ‘있다’ ‘없다’ ‘크다’ ‘작다’ 등 세상을 상대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은 인간이 지(知)로 계산한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 따라 갖가지로 변화할 수 있음으로 결정적인 결론을 여기에서 얻으려함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꼬집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정된 관념의 틀을 수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 관념의 틀에 사로잡혀 자신을 구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인을 자신의 틀 속에 묶어두려 한다.

내가 갖고 있는 잣대로 시시비비를 가리려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고 고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무것도 구별되어 있지 않은 세상에서 산다면 우리는 좀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선과 악도 없고, 권력과 신분도 없는 세상, 도덕과 권위, 가난과 부유도 없는 세상에서 산다면 사물에 얽매인 현실을 초월하여 대자연의 무궁한 품속에서 자유로이 노닐 수 있을까.
나를 둘러싼 온갖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

정해진 모양새에 머무르지 않고 대자연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이고 싶다. 관념으로 쌓아올린 벽을 무너트리고 한없이 흘러가는 구름이고 싶다.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관념의 끈을 잘라 버리고 절대 자유로운 경지인 소요유에 머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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