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오라버니 나사로의 장례식을 치르고 슬퍼하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마을 어귀까지 달려 나가 예수님을 맞으며 말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동생 마리아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찾는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일어나 달려 나갔다. 마리아도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울면서 말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께서 흘리시는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무엇이 그렇게 가슴 아파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일까?

그동안 믿고 의지했던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먼저 천국으로 보내고 의지할 곳 없이 살아가야 할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은 것을 아시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면서 오셨다.

예수님께서 지금 오신 것은 단순한 위문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 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가? 무엇이 그렇게 가슴 아파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인가? 예수님은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을 보고 계신다.

그 마음을 보실 때 예수님은 가슴이 아팠고 눈물이 났다. 그 마음에 무엇을 보셨기 때문인가? 마르다나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첫 마디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였다.

이 말속에 담겨 있는 뜻이 무엇인가? "주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하는 말이다. 주께서 좀 더 빨리 오셔서 고쳐주셨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무 늦게 와서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지금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원망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고 슬프게 한다. 

두 자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늦게 오신 것 같지만,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전혀 늦은 것이 아니다. 두 자매가 볼 때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와서 병을 고쳐주시면 좋았겠지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낙심하고 원망할 때가 많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눈물을 흘리시는가? 그 두 번째 이유는 두 자매가 가진 믿음 때문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흘 전에 나사로를 고쳐주실 예수님은 믿었다. 마지막 부활 때에 나사로를 살려주실 예수님도 믿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려 오셨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흘 전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한다. 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한다. 지금 여기서 다시 살려주실 현재적 믿음을 갖지 못하고, 과거에 역사하셨던 주님을 믿는 과거적 믿음과 장차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에 대한 미래적 믿음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2천 년 전에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며 이적을 행하셨던 주님이시다. 또 장차 천사장의 나팔소리 앞세워 다시 오실 주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는 주님이시다. 지금 여기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예수님은 슬퍼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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