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칠 칼럼위원/화평교회 목사

춘향전 중 어사또 출도 하는 날, 변 사또는 생일을 기념해 축하 파티를 하고 많은 축하객 가운데서 끝내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에게 형장을 씌우고 하옥시킨다.

그러나 그때 암행 어사 출도야! 외치는 소리와 함께 변 사또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으려 한다. 그리고 그에게 내린 최후의 판결은 본고파직! 그는 한때 고을 원님으로 불리면서 백성을 제 마음대로 부려먹던 실세였지만 하루아침에 감옥이 제 안방이 되고야 말았다.

성경의 인물 중에 하만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기원전 470년대 세계적인 강국 페르시야 왕국의 왕의 총애를 받은 총리였으나 대궐의 문지기 모르드개와 그 민족을 죽이려다 자기와 자기 민족이 다 죽임을 당하는 바사국의 변 사또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총리로서 왕의 명을 받들어 충신을 포장하고 선정을 베풀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왕을 위험에서 구해 준 충신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한 것과 더 나아가서는 그 충신 모르드개를 죽이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아니해 그 민족까지 다 죽이겠다는 엉뚱한 발상을 하다가 결국 자기가 그 형장의 이슬이 되고만 것이다. 

이 두 이야기에서 주는 교훈을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돼라" 아니면 "최종 심판에 당당한 사람이 돼라"라고 한다면 어떨까?

오늘 제목을 세례요한의 호연지기(공명정대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라고 정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시대의 사람으로서 예수님보다 먼저 광야에 나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외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의 외모는 그와 전혀 딴판이었는데 옷은 낙타털옷이었다 하는데 털옷이라고 하니 옷이지 아무런 공정을 거치지 않은 자연산 낙타 가죽 그 자체를 걸쳤으니 그것이 무슨 꼴이겠는가! 거기다가 허리엔 가죽띠를 띠고 먹는 것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야인이었고 그것도 좋게 말해 야인이었지 어쩌면 광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될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정 반대로 그의 모습은 거룩해 보였고,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는 죄를 고백하라면 어떤 무서운 죄라도 그 앞에서 다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물속에 들어가 세례를 받으라면 그대로 물속에 들어가 세례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보이지 않은 신적 권위까지 넘쳤던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는 결국 왕의 죄를 지적한 괘씸죄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게 되지만 그의 얼굴 어디에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함이 없는 평온함과 당당함이 넘쳐났고, 나중 그에게서 죄를 지적당한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의 증오로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그때에도 당당한 선지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그야말로 호연지기의 자태를 세상에 보여주었던 사람이 세례요한이었던 것이다.

그가 비록 옷 같지않은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야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할지라도 그의 공명정대함과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왕에게나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호연지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단 말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 심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엔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위 틈에 숨으면서" "산아 바위야 내 위에 떨어져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워달라"고 하는 죄인들의 벌벌 떠는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앞에 말한 산아 바위야 하면서 허둥댈 때가 우리 앞에 분명히 다가오게 될 것이고, 그때에 세례요한처럼 당당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호연지기의 또다른 뜻 공명정대하여 어떤 사람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기개가 넘치는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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