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김승옥 著

천상민/세풍건설중기
아주 희미하게 기억되는 것은 윤정희라는 여배우가 양복 입은 말끔한 신사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으로 당시에는 그 영화의 제목이 '무진기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 몰래 본 영화라 이 한 장면을 빼고는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무진기행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은 20대 시절에 들어서다. 서점에서 산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읽다가 김승옥이라는 작가를 알았다.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자이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문체와 묘사로 문단에 널리 알려진 작가가 김승옥이다.

무진기행은 1964년 10월 '사상계'를 통해 발표된 작품. 5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현재 문단을 주도하고 있는 한강이나 신경숙의 작품에 결코 손색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세련되고 간결한 묘사가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그들의 스승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주인공이 미망인이 된 아내와 결혼 후 전무로 승진하기 위해 며칠간 서울을 떠나 있는 공간이 그가 어린시절을 보낸 무진. 참담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얼룩진 그곳에서 윤정희가 분했던 하인숙을 만나고 매력에 빠져 벌이게 되는 일탈. 또 하인숙을 사랑하는 후배 박과 출세한 속물인 친구 조.

이 작품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공간 서울과 묘하게 대립되는 일탈의 세계 무진을 교차시켜 현대인들의 고뇌를 세밀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무진을 탈출하고 싶어하고 그와 일주일 동안만 멋진 연애를 경험하고 싶다는 하인숙에게서 그는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을 느낀다. 그녀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음날 주인공은 상경을 요구하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는 갈등한다. 서울로 가겠다고 작정한 후, 하인숙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찢어버린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는 서울로 간다.

주인공은 결국 속물이다. 그리고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하인숙도 같은 속물이다. 클래식을 전공한 음악선생이 출세한 남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장면에서 그런 사실은 확연히 드러난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반세기 전, 김승옥은 이 작품을 어떤 심정에서 썼을까. 그리고 다시 시간을 되돌려 오늘, 이 작품을 읽는 나는 또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가. 이 가을 다시한번 무진기행을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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