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광 거제초등학교 교감

석남사 뒷길로 해서 가지산(加智山)에 오르는 산머리에 쌀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바위 아래 암자에는 스님 한 분이 수도하고 있었다. 염불을 하시다가 배가 고프면 마을로 내려가 동냥을 하곤 했는데 그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바위틈에 쌀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쌀은 먹어 배고프지 않을 만큼씩만 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때부터 스님은 마을로 내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쌀이 너무 답답하게 나오니 그 구멍을 크게 내면 쌀이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쌀 나오는 구멍을 크게 뚫었다.

그랬더니 그 바위에서 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이 쏟아졌다는 전설이 있다. 이 쌀바위 전설은 모든 지방마다 공통적으로 다 있는데 이는 욕심과 탐심을 경계하는 교훈으로 삼고 있다.

정해년 새해 첫 달도 벌써 절반을 넘긴 엊그제 지리산 자락의 운조루(雲鳥樓)를 다녀왔다.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1726~1797)가 지은 집으로 ‘구름과 새가 머무는 집’이라는 뜻일진대 그도 그럴 것이 뒤로는 바로 지리산 노고단 능선이 배산(背山)이 되고, 임수(臨水)는 섬진강을 삼아 좌청룡 우백호에 안산까지 그 봉우리가 예사롭지 않는 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본래 이 집을 영조 52년(1776년)에 지을 때는 99칸이었지만 지금은 퇴락한 고옥으로 솟을대문 양쪽으로 12칸씩 줄을 지은 행랑이 그 때의 번창함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마침 운조루 종가 며느리께서 친절하게도 이곳 저곳을 잘 안내해 주었다.

솟을대문 앞에 걸려 있는 호랑이뼈 이야기며, 훈장을 모시고 자녀들 교육시켰던 사랑방, 안채를 지나 뒷간까지 설명해 주었는데 그 중에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는 부잣집 밥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펑펑 올라가 배고픈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 굴뚝이 낮다는 것과, 곳간채 앞에 놓여 있는 쌀뒤주다.

이 뒤주가 바로 그 유명한 ‘타인능해(他人能解)’다.

해마다 운조루에서 논농사 2만 평을 지어 연평균 200가마 가량의 수확을 거두어 들이면 그중 36가마 정도를 타인능해를 통해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돌려준 것이다.

타인능해는 누구나 열 수 있다는 뜻으로 뒤주의 아래쪽에 작은 구멍을 내고 마개를 돌리면 쌀이 나오는 구조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냥 주면 그들의 자존심에 해를 끼치게 되니 가져가는 사람의 마음에서 걱정하고 배려한 베품의 상징이 바로 운조루 타인능해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쌀바위에 나오는 스님처럼 욕심을 부려 쌀구멍을 크게 만들지도 않았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달 그믐이 되면 뒤주가 비어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 쌀이 남으면 혹시 덕이 모자라 사람들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부끄러워했다니 이게 바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아니 겠는가.

부자의 대명사로 일컫는 경주 최부자 집안에서도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있으면 이는 우리집안의 책임이고, 흉년이나 수해가 난해에 남의 땅을 사들이지 말며, 며느리가 새로 들어오면 3년은 무명옷을 입게 하는 등 엄격한 수칙을 지켰다.

우리말에 ‘마당쓸이’가 있다. 동이 트기전에 누가 와서 부잣집 앞마당을 쓸어놓으면 이것을 본 주인이 누가 쓸었는지 알아낸 후, 그 집 식구 수에 따라 먹을 양식을 보내주었다.

동트기 전 마당쓸이는 우리 집 양식이 떨어졌다는 표시였고 이를 눈치챈 부자는 마당 쓸은 댓가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을 지켜주는 나눔의 방식이었다.

있는 집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가난해도 함께 나누는 마음은 똑 같았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식구보다 한 사람 몫의 밥을 더 짓는데 이를 ‘한덤밥’이라 한다.

그 밥은 못 먹고사는 사람을 위한 몫으로 뒤란 울타리의 구멍을 통해 전해지게 된다. 덕분에 배고픔을 면한 사람들은 그 댁의 경조사를 잊지 않고 있다가 반드시 가서 일을 해주거나 주인이 부탁하지 않아도 그 집 밭을 매놓고는 했다.

까치를 위해 감을 다 따지 않고 남겨두는 까치밥도 그렇고, 콩을 심을 때는 세 알을 심게 되는 데 이는 한 알은 새가 먹고,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에게 먹이기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일은 지난해 전남 장성군 단전리의 주인없는 가게로 훈훈한 미담을 남겼던 ‘양심가게’에 CCTV가 설치됐다는 보도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면 우리는 너무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더 슬프다. 이런 세상이기에 운조루의 타인능해는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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