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바울 사도는 종종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아주 충격적인 자기소개이다.

'종'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은 노예가 없으니 노예가 얼마나 천한 신분인가를 실감할 수가 없다. 당시에는 로마 인구의 약 절반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생산수단이었단 말이다.

그래서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예는 사람대접을 못 받았다. 당시의 노예 시장에 가면 반나체가 되어서 단 위에 전시되어 있는 노예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들면 흥정을 해서 사 간다. 집에 가서는 이미 뚫려 있는 귓불에다 주인이 자기 이름을 새긴 귀걸이를 달아 준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노예는 귀걸이를 달아준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노예는 자기 이름도 없다. 자기 생각도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의지나 꿈, 계획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말할 줄 아는 짐승처럼 그저 주인인 귀족을 위해서 농사나 짓고 심부름이나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를 소개할 때 '난 노예요'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노예요'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다.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로마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예수님의 노예로, 예수님의 종으로 소개하기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핍박자요 훼방자였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약속하셨던 인류의 메시야요, 이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이요,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종으로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힘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분이 수 천 년 동안 인류가 대망하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때 그는 어디를 가나 자기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는 없어지고 예수님만 남은 것이다.

우리도 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이다. 내가 예수님의 종 됨을 알고 살 때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종이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고백하는 주부라면 사치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믿는 학생이라면 학창 시절을 허송세월 하면서 어영부영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한다.

자기를 예수님의 종으로 아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눈치 봐 가면서 태만하게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를 예수님의 종으로 아는 사람이 물건을 팔 때에 위에는 번지르르한 것을 두고 안에는 좋지 못한 것을 두어서 눈속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싫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종이 되면 재미없고 부담스러운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주님의 종으로 철저히 순종하면 마음에 평안이 넘치고 인생이 행복해진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평안함이 있다. 기쁨이 있다. 능력이 따른다.

우리가 예수님의 종답게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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