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의 시혼을 찾아서'…동랑청마기념사업회, 북만주 문학 기행

연길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묘지 찾아 빛바랜 모습에 '가슴앓이'
어둠속 기차 안에서 일출 구경…서광 비친 만주엔 끝없는 광야만
하얼빈 연수현 가신진 돌아보며 '청마' 인간적 삶의 궤적 돌아봐

▲ 지난 6일 동랑청마기념사업회가 뜻 깊은 문학기행 길에 올랐다. 60여년 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만주 생활을 해야만 했던 청마 선생의 흔적을 찾고 그의 시혼을 찾는 이번 기행길은 청마의 세 따님과 함께 해 더욱 뜻 깊었다. 사진은 1940년대 청마 선생이 생활했던 하얼빈시 연수현 가신진의 현재 모습.

제1회 청마연구상에는 방인태 교수(서울대)가 수상했고 제2회 청마연구상에는 당시 중국 유학생이었던 서여명 교수(중국 남경대)가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특히 2회 청마연구상 수상자인 서 교수는 중국인이라는 이점을 살려 '청마 유치환의 북만기행기'라는 박사논문을 발표하면서 청마의 만주생활 당시 북만주의 시대적, 지리적 상황을 바탕으로 청마가 북만주에 머물며 쓴 시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원천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번 문학기행 일정에서도 서교수는 하얼빈에서부터 기행단을 맞아 일정이 끝날 때 까지 일일이 가이드를 도맡으며 청마의 흔적을 찾는데 동행하는 등 청마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 청마 선생의 흔적을 찾기 전 같은 시대 만주에서 문학 활동을 했던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일본 시 거부한다는 이유…나이 서른 저음에 만주로

서른 즈음의 청마는 만주로 떠났다. 그의 장녀 유인전 여사(82)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청마는 일본 시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협박을 받고 쫓겨 청진으로 도망을 계획했다. 하지만 형인 동랑(유치진)이 "처가에서 북만주에 사 놓은 농장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라"는 권유로 청마는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싣기에 이른다.

기행단은 청마가 생활했던 하얼빈과 연수현, 가신진을 방문하기 전 연길지역을 들러 항일시인 윤동주의 생가와 묘지를 먼저 찾았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또다시 하얼빈으로 가는 동안 고맙게도 대부분의 간판에 한글이 기재돼 있어 낮선 땅이라기보다는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용정에서의 연변 조선족 원로시인인 최용관 시인과 김영건 시인, 전 용정시 박호만 시장과 일정을 함께했다.

점심을 먹고 윤동주 묘소를 찾았지만 궂은 날씨 탓에 오르지 못하고 소설 '토지'에 나오는 북한의 회령시 지역을 보기 위해 삼합으로 향했다. 두만강과 북한 땅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잠시 민족분단의 아픔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다시 용정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에 들렀다. 윤동주 생가는 생각보다 초라했다. 빛바랜 사진과 먼지투성이로 변해버린 생가 모습을 보는 마음이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만주의 조선족 사이에서 시성으로 추앙받는 윤동주 시인의 황폐한 생가를 보며 문득 청마와 동랑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방치해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렇듯 초라해지지 않을까 염려가 됐다.

기행단은 다시 3.13 의사릉, 용정 일본 간도 총영사관 건물과 지하 감옥 등을 둘러보며 첫날 일정을 마쳤고 2일째에는 백두산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밤새 내린 눈으로 아쉽게 백두산 천지에는 오르지 못하고 장백폭포를 구경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백두산을 내려오는 길에 기념사진 촬영 중 공원 관계자들에게 플랜카드를 압수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백두산을 오르는 다수의 한국관광객들이 동북공정 등을 이유로 중국을 비방하는 글귀나 백두산은 대한민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플랜카드를 펼치기 때문에 한국관광객들에게 특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민족의 영산에서 사진촬영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 전 기행단은 다시 용정의 대성중학교에 들러 윤동주 시인의 삶의 흔적을 둘러본 뒤 미리 준비한 학용품을 사랑의 집에 전달하고 거룡 우호공원을 잠시 방문했다. 거룡 우호공원은 지난 1996년 거제시와 용정시 간 자매결연 때 조성한 공원이다.

연길에서 하얼빈까지는 열차를 타고 꼬박 11시간이나 걸렸다. 열차는 현지시간으로 8시 40분 쯤 연길을 출발해 다음날 오전 7시 40뿐 쯤 하얼빈에 도착했다.

▲ 기행단이 연수현 가신진 조선족 중학교를 방문, 학생들과 포즈를 취했다.

서광 비친 만주 땅엔…끝없이 펼쳐진 광야뿐

어둠을 뚫고 달리는 기차에서 일출을 구경했다. 일출 시간은 오전 4시 30분 쯤이었다. 서광이 비친 만주 땅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였다. 청마선생의 시 구절에도 자주 인용되는 광야를 보면서 잠시 시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얼빈에서는 서여명 교수가 기행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 교수의 동행은 본격적인 청마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여행길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얼빈 시내를 돌면서 청마의 세 따님은(인저·춘비·자연) 80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60여 년 만에 다시 밟은 만주땅에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나 많이 바뀌긴 했지만 세 따님은 자신들의 아버지인 청마와 함께 유람을 나섰던 태양도와 산책길, 강가, 하얼빈 시내 건물, 도로, 공원 등을 기억하고 있었다. 청마의 작품중 만주생활이 묻어난 '극락사' '광야에 와서' '우크라이나 사원'등의 작품무대도 함께 탐방했다.

기행단은 하얼빈에서 다시 연수현과 가신진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마가 7년의 만주 생활 중 6년을 머물던 가신진에 당시 청마가 기거했던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길을 재촉했다.

가신진에 닿기 전 기행단은 잠시 발걸음을 멈춰 연수현의 한 조선족 중학교를 방문했다. 이날 서 교수는 자신이 청마연구상으로 받은 수상금의 일부를 '청마장학금'이라 이름 붙여 학교 측에 전달했고 기행단에서도 미리 준비한 서적과 학용품 및 일상생활용품을 기증했다.

연수현 조선족 중학교 최인호 교장은 "이곳 학생들의 부모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한국에 취업해있지만 한국의 민간단체가 관심을 갖고 방문 한 예가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을 맞아 기쁘다"고 말했다.

또 최 교장은 "이번 교류로 연수현 조선족중학교에서는 앞으로 학생작문백일장 활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교류의 장을 열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가신진 탐방길에 연수현 조선중학교 교사들과 조선족 문인들은 조금이라도 기행단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동행을 함께했다.

가신진으로 향하던 중 셋째 따님인 유자연 여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 여사는 "가신진에서 남동생이 죽었는데 아버지가 홀로 동생을 묻으러 가던 뒷모습이 생각난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청마는 얼어붙은 땅에 외아들의 시신을 파묻고 몹시도 가슴 아파했고 그 절절함은  '광야에 와서' '구름에 그린다' 등의 작품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가신진에 도착한 기행단은 현지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노인의 안내로 청마가 운영했다는 정미소 부근을 탐방 했지만 60여년이 지난 지금 건물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수현의 공무원과 연수현 조선중학교에서 청마의 남은 흔적을 찾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다짐을 받았고 청마를 위한 기념사업에도 동참 할 것을 약속했다.

▲ 청마 북만주 생활 당시 쓴 시 '우크라이나 사원'의 배경이었던 우크라이나 사원의 현재 모습.

청마 기거한 곳 못찾은 아쉬움…그의 흔적·추억 담으며 달래

이번 기행에서 비록 청마가 기거했던 건물 하나 돌아보지 못했지만 하얼빈과 연수현, 가신촌 지역들을 돌아보면서 청마가 느꼈을 아픔과,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만주까지 떠나와야 했던 그의 인간적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값진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기행단은 마지막으로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내부에 위치한 안중근 기념관을 둘러보고 인천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기행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청마의 작품 속 배경을 둘러보며 소중한 사료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과 청마의 세 따님과의 동행으로 시인 청마가 아닌 인간적인 삶을 살다간 그리고 따뜻하고 인자했던 아버지의 삶을 살았던 그의 흔적과 추억을 담아 올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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