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창수 칼럼위원

▲천창수 송진교회 목사
예수님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죄는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가져온다. 그러기에 죄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높은 장벽을 만들게 한다. 죄는 살인을 자행하게 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한다.

죄가 들어온 후에 인간관계가 파괴되었다. 가인이 그 아우인 아벨을 죽이게 되었다.  죄가 지배하는 세계에는 정당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올바른 가족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체의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진다.

우리 예수님은 이 죄를 없이하고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죄를 없애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담을 허시고 하나의 가족을 이루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는데, 이를 우리는 가상칠언이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요 19:26-27절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어머니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이니라" 요한은 이 말씀을 듣자마자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그의 어머니로 모시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고 계신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히 아들로서 어머니에 대한 의무감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러야지 '여자여'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새로운 한 가족을 창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새로운 한 공동체를 만들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시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오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화목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와 요한을 하나의 새로운 가족관계로 묶어주고 계신다.

새 가족, 새 공동체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요, 에덴에서 약속되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지금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고 새로운 공동체 새 가족을 만들고 계시는 것이다. 요한이 마리아의 아들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제 요한에게 말씀하신다. "보라 네 어머니이다" 또 마리아에게 말씀하신다. "보소서 아들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가족관계가 만들어졌다. 요한은 이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예수님은 새로운 한 가족관계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교회는 하나의 가족이요 새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가족관계로 맺어지는 한 새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되었다. 교회는 예수님 피로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요 새로운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존귀한 공동체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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