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왕성 내에 위치하고 있는 천지

둔덕면은 고려 성종 2년(983년) 거제지역이 진주목에 속했다가 995년 산남도의 기성현이라 고쳐 불렀으며 거림리에 토성을 쌓고 거제지역의 현지가 되던 곳으로 거제의 옛 이름 기성의 시초가 됐던 곳이다.

고려 18대 왕 의종이 24년 (1170년) 8월에 대장군 정중부와 견룡행수 산원, 이의방, 이고 등이 국왕의 보현원 행차 시에 순검군을 모아 호종한 문관과 대소신료 등을 살해한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그 해 10월 의종이 3년간 둔덕면 거림리에 위치한 우두봉 중허리에 견내량을 내려보고 쌓은 기성에 귀향와 살았다.

명종 3년(1173) 8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왕의 복위를 획책해 경주에 나갔다가 이의민에 시해되자 이때부터 기성은 폐왕성이라 불리고 있으며 지난 1974년 2월 16일 지방기념물 제 11호로 지정됐다.

둔덕면은 조선 세종 14년(1432) 거제읍성인 고현성이 쌓이면서 7면을 두고 이때부터 둔덕면(屯德面)이라 칭하고 권농관을 집정하게 했다.

영조 45년(1769) 방리제 실시에 따라 영등(학산), 한산도, 하둔덕(하둔), 산방, 거림치(巨林峙), 상둔덕(상둔), 법동포(법동)의 7방을 두었다가 고종 26년(1889) 부터는 상둔, 상서, 시목, 마장, 거림, 농막, 산방, 하둔, 적도(화도), 술역, 신호(거제대교), 영등(학산), 어구, 법동, 소랑등 15리로 하고 한산면을 분리해 산달도를 같이 관할케 했다.

이어 고종 32년(1895년)부터 면리제 개편을 하면서 거제지역을 읍내면(거제면)을 서부와 동부면으로 분리하고 서부면에 소랑, 법동, 산달이 편입되었으며, 둔덕면은 옥동, 유지, 상서, 시목, 마장, 거림, 농막, 산방, 방하, 죽전, 하둔, 어구, 녹산, 술역, 화도, 학산과 한산도를 다시 편입해 17리가 됐다가 광무 4년(1900년) 한산면이 분리됐다.

둔덕면은 고려시대 의종왕이 상하에 호위군의 주둔지를 두었고 그로 인해 붙은 지명이 대부분이다. 넓은 들판에는 둔전을 설치해 식량을 생산 공급 때문에 붙은 지명도 많다.

▲ 산방산 비원 분수대

⊙ 학 산 리 (鶴 山 里)
둔덕면 서북쪽 견내량과 거제대교 남쪽에 위치하고 한려수도(閑麗水道)의 관문으로 인조원년(1623년) 거제칠진의 영등진을 장목면 구영에서 옮겨 영조 45년(1769년) 영등방이라 불렀고 고종 32년(1895년) 학산 마을의 동쪽 비학산에서 비롯된 마을이라 해 학산리로 바꿔부르기 시작 했다. 학산리는 현재 영등을 학산이라 부르고 영등진(英登鎭)의 관아가 있던 곳을 아사(衙舍)마을로 행정리가 분리되어 있다.

○ 학산(鶴山)마을
 폐왕성과 비학산 밑에 위치해 영등을 학산이라 부르고 있지만 마을 주민들은 원래 영등진터 였기 때문에 영등(永登)으로 환원되기를 원하고 있다.

○ 아사(衙舍)마을
학산의 북쪽에 영등진의 관청이 있던 곳이며 지석묘(支石墓)가 산재하는 역사 깊은 마을이다.

○ 골마을
 아사의 동북쪽 골짜기 따라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 골마을뒷산
 아사 골마을 뒷산 높이 86.8m에 삼각점(三角点)이 있다.

○ 구선창들
 아사의 북쪽 사등면의 왜성과 접하는 논들이 있다.

○ 꾸정물골
영등진의 방위군이 군복이나 밥그릇 등을 세탁하던 개울에서 오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니 이 꾸정물 때문에 갯벌에서 조개나 고동을 채집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현재는 세양수산의 어장막이 있다.

○ 도사천
 학산마을 위에 있는 우물로 을유년 가뭄때 물이 나오지 않아 길가던 도사가 지팡이로 두드리니 물이 솟아났다해 도사천이라 불려졌던 우물, 학산마을의 식수정이었다.

○ 동헌터
 아사의 남쪽에 영등진의 동헌이 있던 곳이나 지금은 논이다.

○ 당거리
학산마을에 옛날 산신당이 있었다.

○ 비학산
아사의 동남쪽에 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산이 있으므로 영등포(永登浦)를 학산(鶴山)이라 개칭했다한다.

○ 사부정터
영등포영이 있을때에 활을 쏘던 사부정이 있었다.

○ 새미등
도사천 윗쪽에 있는 등성이로 깊은 골짜기를 새미골이라 한다.

○ 송굿바위
비학산에 우뚝선 선바위가 있고 그 동쪽에 송곳 모양의 뾰족한 바위가 있다.

○ 영등포진
조선 성종(1470)때 거제칠진의 하나로 장목면 구영에 두었던 진을 인조(1623) 때 이곳 영등포로 옮겼으며 수군만호의 병정으로 군관, 진무, 지인을 두고 병선과 사후선인 작은 군선에 수군을 주둔시켰는데 영조 26년(1750년)에 소비포 현 장목포로 옮겼다가 고종32년(1895년) 갑오경장 다음해에 통제영과 함께 폐지되고 학산리가 되면서 사라지게 됐다.

○ 용둠벙
불근등 밑에 용둠벙골이 있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연못이 있다.

○ 점  터
 아사 동남쪽 앞에 있는 들판에 영등진이 있을때에 엽전을 만들던 점포가 있었다.

○ 통세미
 영등 위쪽에 있었던 샘으로 지금은 둠범속에 들어갔다.

○ 포수청터
 영등 남서쪽에 영등포진이 있을때 포수청이 있었다.

○ 함덕들
아사 동쪽에 있는 들에 함정을 팠었다 한다.

○ 호송여
 영등 앞바다의 한려수도에 돌섬 암초가 있는데 썰물이면 보이고 민물때에 지나가는 선박들이 좌초되므로 마을 젊은이들이 교대로 횃불을 비추고 지나가는 배들을 무사하게 안내했다는 갸륵한 전설의 암초이다.

▲ 청마기념관 옆 청마생가 복원터

⊙ 술 역 리
통영과 바다과 바다를 마주 하고 있는 술역리는 고려 때 의종왕이 거제도로 쫓겨오면서 육지와 교역하는 수역(水驛)을 두면서 술역(述亦)이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전래된다.
서북쪽은 내평, 술역마을이고 남쪽은 호곡, 녹산이 위치하고 있고 앞바다에는 화도가 있다.
영조45년(1769) 당시 술역리 서북지역은 영등방에 속했고 남부와 화도는 하둔덕방에 속했다. 고종 32년(1895년) 술역, 녹산과 화도리를 두었다가 다시 1915년 술역리로 법정 통합 했다.

○ 술역마을
  기성현때 통영시와 농수산물과 공산품을 운송하던 곳으로 수역이라 했으며 의종왕이 쫓겨왔을때는 시종문무관의 관수용이 불어나 항구의 역할을 충족했으니 선박의 입출항이 계속 많이 있었으므로 이을술과 또역, 클역자로 바꾸어 술역(述驛)이라 했다.

○ 내평마을
술역의 북쪽 안들에 마을이 형성되어 내평이라 했다.

○ 녹산마을
하둔에 옛날 여객선 부두가 있었으나 수심이 얕고 간조시에는 간석지가 되므로 해방후 녹산 부두로 옮겼으며 바로 앞에 딴녹섬 또는 소록도가 있어 녹산이라 했다.

○ 호곡마을
 술역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바닷가 절벽에 굴이 많이 있어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해 범굴이라 불렀다.

○ 화도마을
녹산과 통영의 바다 중간에 있는 섬으로 붉섬과 방화도가 있으며 봄철이면 진달래꽃의 온통 붉은 섬이고 방화도의 봉화불이나 현대의 등대불이 붉게 비쳐주니 붉섬으로 화도라 했다.

○ 구렁샘
술역 남쪽의 바다 옆에 있는 들판에 맑은 물이 많이 솟아나 수역의 선박용수나 주민식수의 샘터이다.

○ 당  산
 내평 서쪽 바닷가에 우거진 숲이 있고 그 등성이에 풍어를 축원하던 당이 있었다.

○ 딱밭들
술역 동북쪽에 닥나무의 밭이 있었다 한다.

○ 맞바구미
녹산과 하둔의 경계 바닷가에 방답구미를 바라보는 주막, 잡화점이 있던 곳인데 옆의 산을 깍아 1935년 둔덕 간척지의 토취원이었고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이주하고 토취장은 주유소가 설치됐다.

○ 미영 밭구미
 화도 염막개 동북쪽 목섬의 서쪽에 있는 촌락으로 목화를 재배했으므로 미영 밭구미라 했다.

○ 미  포
화도 동남쪽에 논이 있는 곳이라 쌀개라 해 미포(米浦)로 이름했다.

○ 발  개
 염막개 서남쪽에 있는 바다에 민물과 썰물때 고기가 유동함으로 대발의 죽방렴(竹防廉)을 설치해 바닷고기가 들어가도록하는 긴 말뚝에 대발의 어장이 있었다.

○ 방화도(放火島)
화도 서북쪽 통영 동호만 앞바다에 장고 모양의 높이 25m에 삼각점이 있는 섬이다. 임진왜란 때 봉화불로 교신했고 근세기에 등대를 설치해 일명 등대섬이라 한다.

○ 범바위굴
 술역과 범굴의 산등성이 높이 72.4m에 삼각점이 있는 바닷가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동굴이 있다. 이굴은 호곡마을 지명의 유래가 되기도 한다.

○ 새  여
녹산과 화도사이의바다에 있는 돌섬으로 민물때는 참새같고 썰물때는 독수리 같이 크게 보이며 철새들의 쉬는 섬으로 새여라 하고, 장고 모양으로 잘록해 항도(項島)라 한다.

○ 송  포(松  浦)
 녹산의 서남쪽에 녹산천의 하구로 송림이 울창해 어부림을 형성했으니 옛날 돌발을 설치해 봄 멸치, 칼치를 가두어 잡은 곳이다.

○ 시묘등
범골 뒷쪽에 있는 등성이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아버지 묘옆에 초막을 직고 삼년을 살았다는 전설의 등성이다.

○ 염막포
송포 동쪽 바닷가에 소금밭과 막사가 있었다.

○ 와선포
화도 남단 임진왜란때 왜선이 침입했다 해 왜선포라 하기도 하며 시원한 바닷가에 신선이 내려와 누워 잠을 잣으니 와선포라 하며 높이 115.3m 와선산에 삼각점이 있다.

○ 작은진개
 영등진을 큰 진개라 하고 남쪽 술역지역을 작은 진개라 해 군선이 정박하던 포구이다.

○ 절터고랑
 술역 동북쪽 골짜기에 옛날 절이 있었다.

○ 진작구미
미영밭구미 서쪽 깊이 굽어 들어간 후미진 곳에 진작구미의 개촌이 있다.

○ 캥수바위
 내평 동쪽산에 있는 바위를 두드리면 꽹과리 소리가 나는 바위다.

○ 큰  여
아사의 북서쪽 왜성개의 서쪽 바다에 큰 돌섬이 있다.

○ 투구바위
염막개 남쪽에 투구 모양의 바위가 있다.

⊙ 하 둔 리
고려 기성현 때 의종왕이 쫓겨와 호위군을 윗 아래에 주둔시켰으니 하둔덕방이라 했고 장들에 둔전을 설치해 쌀과 보리를 생산해 식량을 공급했다. 하둔리는 1915년 법정리가 됐고 1928년 면사무소를 방하리에서 옮겨와 둔덕지역의 중심지가 됐다. 둔덕천 건너 방답(芳踏)마을이 있다.

○ 하둔마을
 둔덕만이 깊숙히 들어와 민물때에는 통영과의 여객선과 장군들의 돛배들이 드나 들었으나 썰물때는 넓은 간석지로 변해 선박출입은 할 수 없고 초승과 보름 때 온 면민의 아낙들이 모여 우럭, 바지락, 맛조개 등을 채집했으나 1935년 80ha의 간척사업으로 조개잡이가 사라지게 됐다. 면사무소와 교통이 편리해 아래와 윗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상촌, 하촌이라 부르다가 하촌주민의 반대로 선창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 방답마을
 하둔 동쪽 둔덕천 건너 마을로 1935년 80ha의 간석지에 간척사업을 한곳으로 임진왜란 전에 방답진을 두었던 곳이다. 현재 전라도 여천군 돌산(突山)으로 진을 옮겼고 임란 때에는 그 곳 첨사 이순신(僉使 李純臣)이 옥포대첩때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참전해 선무삼등공신을 받았다. 현재 방답꿈 또는 방답구미라 전래되고 있다.

○ 가잿고랑
하둔서쪽 진등 동쪽에 있는 계곡으로 가재가 서식해 어린이들이 소먹이 나갔다가 가재 잡던 고랑이다.

○ 과녁터
하둔 서쪽과 등새미 사이에 하둔덕에 주둔하던 호위군의 활을 쏘던 과녁이 있었다.

○ 김씨효열문
 하둔의 서남쪽에 김해 김씨의 효렬비석의 정문이 있었다.

○ 당산밑들
하둔 동쪽산에 당산제를 지내던 곳의 아래에 있는 들이다.

○ 둔덕천
둔덕골에서 둔덕만으로 흐르는 길이 7.7km의 큰내는 거제도 세번째이므로 둔덕평야에 용수를 공급하고 은어와 참게가 올라와 자라고 봄철에는 병아리(사백어)가 민물따라 바다에서 올라오니 하구에 고랑을 파고 썰물 때 그물로 떠서 일품요리로 즐겁게 먹기도 하며 여름철은 은어와 참게 잡이 하는 둔덕면 지역의 젓줄이다.

○ 법동개재
 방답 동쪽에서 거제면 법동개로 넘어가는 길이다.

○ 봉산고개
 하둔 서쪽에 올라가 술역리로 가로 질러가는 재로 옛날 학생들이 통학길이 있었다.

○ 비렁둠벙
하둔 동쪽 둔덕천에 죽전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앞산의 암벽밑이 급류에 파여 깊은 용둠벙을 만들었으나 옛날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는 전설과 물이 깊고 급류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멱감기를 주위 시키고 있다.

○ 송  골
방답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로 좁다 하는 방언으로 솔다에 송골이라 부르고 있다.

○ 수통배기
하둔동쪽 찬샘위에 봄샘이 있고 그 밑에 있는 논에서 생수가 민물때 용출되므로 물통이 있다고 전래됐다.

○ 예담부랑
방답 앞에 있는 골짜기에 돌담장의 담부랑이 있는데 옛날 방답진이 있을때 돌성의 벽이라 전하기도 한다.

○장  들
고려 의종왕이 쫓겨와서 선왕 인종의 왕비 임씨인 공예대비를 안치 시켰던 대비장 앞 넓은 들판을 둔답으로 정해 수곡을 했으므로 장들이라 했다.

○ 장배미고랑
하둔 서남쪽 골짜기에 긴 논이 있고 촌락이 있었다.

○ 찬새미
하둔 장들 밑에 솟아오르는 샘으로 수량이 많고 맑으며 죽전(대밭골) 가는 길가에 있었다.

○ 하  촌
하둔의 아랫마을로 하촌이라 했으나 낮은 사람이 살고 있는 갯촌이라해 이름을 없애고 하둔 뱃머리라 불렀으나 지금은 매립했고 큰 마을 새마을이 됐다.

○ 해미당 고개
방답 북동쪽에서 거제면 할미당인 고당으로 넘어가는 옛날 큰길의 고개이다.

○ 하둔간척지
방답마을 앞바다의 간석지는 100ha되는 넓은 갯벌로 둔덕면의 조개잡이터였으나1930-34년에 일본인 서택효삼랑(西澤孝三郞)와 시공자 고하녹일(古賀鹿一)에 의해 하둔의 맞바구미 등성이를 파고 철교로 흙과 돌을 흙차로 운반해 방조제를 쌓아 간척사업을 했다. 이 간척지는 논 30ha, 염전 30ha, 조수지 5ha, 유지못 10ha와 방조제 상하 2중으로 거제도의 제일 큰 간척지다.

⊙ 어 구 리
 둔덕면의 남동단 거제면과 경계하고 한산도를 앞둔 청정해역이며 어구만을 끼고 있는 풍요한 어촌이다. 영조 45년(1769년) 하둔덕방에 속했다가 고종 32년(1895년)에 어구리가 되었으나 본래는 남부면 저구와 같이 어구라 해 왜구들이 풍량 때 피해 들어오거나 임진왜란 때 방어하던 곳이었다. 1915년 어구리로 법정되었음은 이는 둔덕면 9개리의 끝 마을 이라는 뜻이라는 유래도 있다. 그러나 고려 의종왕이 복위를 꿈꿔 무기를 만들고 외인을 출입금지 시켜 외인금이라 부르면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천혜의 어항이기 때문에 어구(漁口)라 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지고 있다.

○ 딴녹섬
어구의 서쪽 녹산의 바로 앞에 있는 섬으로 술역리 녹산에 속해야 함에도 1915년 세부측량때 어구사람의 어장이 있었으니 어구리에 속했다 하며 섬이 사슴 모양 닮고 초목이 무성해 사슴과 노루가 서식하고 있어 일명 소록도라 부른다.

○ 아지랑
어구의 동쪽끝 거제면과 경계하고 서남쪽 한산면 서좌도와 875m이고 또 한산도와 375m의 송전탑이 있고, 지역의 뾰족하고 언덕이 가파라 아지랑이 갯마을이었으나 청청해역의 굴양식으로 30여호의 마을이 형성됐다.

○ 어구항
 어구 앞바다는 거제도의 내해로 통하는 간만조수의 해수로로 한물때는 12km의 바다물이 바꾸어 주는 청청해역이며 1972년 11월 24일 굴양식 해역으로 한미위생 행정협정을 맺었으며 1974년 9년 5일 거제만 2,121ha(거제 1,537  통영 584)를 수산청 고시 제12호로 지정해 굴, 홍합, 우렁쉥이 수하식 24건 458ha를 양식 허가해 생굴 4만톤을 생산하는 어항이다. 어구의 중앙수산 등 둔덕면 연안에는 8개의 굴 가공공장이 통조림을 생산하며 세계각지에 수출하면서 도로를 개설포장 했고 1994년 8월부터 을지 1호의 카페리선이 한산도 소고포 영개와의 바다 2,875m를 1일 10회 왕복운항을 시작하다가 1996년 1월 130톤 카페리호 을지 제2호(자동차 20대 실을 수 있음)를 취항시키면서 와 제승당 관광객을 수송하는 수산과 관광의 항구가 됐다.


⊙ 거림리
 둔덕면의 중앙의 위치하고 마장, 거림, 농막의 3개 행정리로 영조 45년(1769년) 거림치방이라 불렀으며, 고려 성종 14년(995년) 기성현지로 토성을 쌓고 마을 주변과 북쪽 당산등과 청룡등에 울창한 숲을 육림했으니 거림치 불렀다.

○ 거림마을
기성현의 옛터로 토성안에서 고려유물이 출토되고 마을을 수호하는 숲이 울창해 거림치라 했다.

○ 농막마을
 의종왕이 둔전을 두고 농사를 짓게했으며 윗마을에 농막터의 촌락이 있으니 이를 망하터라 한다.

○ 마장마을
의종왕이 거제도(巨濟島)로 쫓겨와 감목관을 두고 호위군의 군마를 방목했다가 계류시켰던 마을이며 1945년 광복후 까지도 혼례의 차마로 7두를 사양했다.

○ 갓  등
청룡등 북쪽끝에 갓모양의 등성이가 있다.

○ 기와집 몰랑이
 마장 마을 윗 밭들에 기성현때 아전들의 기와집 마을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토기와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

○ 기성현지
고려 성종 2년(983년) 진주목의 영현이었다가 14년(995년) 산남도라 하고 관하에 기성현을 두었다. 거림리 274의 2번지 밭을 중심으로 토성을 쌓았으므로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반란으로 거제도로 쫓겨오게 된 곳이다. 지난 1996년 문화재전문위원 동아대학교 박물관장 심봉근이 상사리 8월 4일(裳四里 八月四日)]이 표기된 기와를 발굴해 거제의 독로군과 상군을 조명하게 된 역사의 보고다.

○ 두덕들
 거림의서남쪽에 있는 등성이 논들로 의종왕을 따라온 관원의 마을과 객사가 있었다함.

○ 마하터
 의종왕이 고관들이 하마하던 정거장이 있었다.

○ 망  골
 폐왕성)밑에 있는 골짜기의 등성에서 정중부의 반란군이 추격해 오는지 망을 보았다는 곳이다.

○ 못  골
마장과 시목의 경계에 흐르는 계곡에 옛날부터 못이 있었으며 일제말기에 포강을 만들었다.

○ 마고덜겅
 의종 24년(1170년) 폐왕성을 쌓을때 옛날 전설의 신선 마고할미가 치마에 돌을 가져와 성을 쌓고 나머지 돌을 버렸다는 너설이 방언으로 덜겅이라 하며 그 규모는 1Ha정도이다.

○ 뱀등 개구리등과 독수리바위
마장의 윗골 우두봉의 줄기가 뱀의 형상으로 내려왔고, 그 밑에 개구리 같은 작은 등성이를 잡을려는 것을 서남쪽 우두봉 큰줄기에 독수리 바위가 개구리를 보호하고 있는 이름이다.

○ 빈정승묘
농막의 망아터 뒷산 중허리에 큰 묘가 있는데 비석은 없고 옛날 거제도로 귀양와서 죽은 빈정승의 묘라 전한다. 현재 사등면에는 실제 빈씨가 현주하고 있다.

○ 서당곡
마장마을 서쪽 골짜기에 고려시대 부터 서당이 있었다.

○ 안치봉
 농막의 남쪽에 있는 산기슭에다 의종왕의대비를 살게한 대비장이 있었다.

○ 여관곡
 농막과 하둔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에 기성고을의 세금을 수납하던 기관이 있었다.

○ 옥토들
거림마을앞 토심이 깊고 비옥한 논들로 소출이 많아 방언으로 옥터라하며 거제도에서는 1둔덕(屯德), 2하청(河淸)이라 전래되고 있다.

○ 우마장
우두봉에서 폐왕성에 이르는 양지바른 넓은 초원은 의종왕이 말을 방목했으며 그 뒤에 소를 놓아 먹였으니 거제는 소섬, 제주는 말섬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약초를 먹은 거제소를 제일이라고 평가됐다.

○ 제장군묘
 마장서당곡위에 뒤앞데기의 넓은 초원이 있고, 임진왜란때 거제도의 첫 의병장으로 송정과 다공 밀바대 싸움에서 왜적을 섬멸하고 이순신 휘하에서 7년간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이등공신의 녹권을 받은 수문장 제 진의 묘와 비석이 있다.

○ 제신암과 제사곡
우두봉 꼭대기에 높이 30m의 큰 바위 굴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사두등(일명:뱀등) 밑 골짜기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골짝마다 산답이 있다.

○ 폐왕성
고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숭문주의 반란으로, 왕이 거제도로 쫓겨와서 우두봉 중허리에 견내량(일명:전하도)을 내려보고 둘레 570m, 높이 5m의 산성을 쌓고 3년간 반란군의 축격이 있을까 감시했으며 성내에는 천지가 있고 북측에는 제단이 있어 주민이 해마다 산신제를 올린 기성이라 했다. 명종 3년(1173년) 경주의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왕의 복위를 꾀하다 정중부가 보낸 이의민에 의해 함께 살해를 당하고 폐하면서 폐왕성(廢王城)이라 했고 현재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돼있다. 성밑까지 임도가 개설돼 자동차의 통행이 가능하다.


⊙ 방하리
둔덕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동은 장갓재를 넘어 위대밭골이고 서쪽은 둔덕천을 경계로 거림리이고 남은 하둔리와 접하며 북은 산방산 밑의 큰마을인 대몰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본래 산방방에 속했다가 고종 32년(1895년) 방하리가 되었고 1915년 법정리가 됐으며 현재 방하와 죽전의 행정리로 정해져 있다.

○ 방하마을
 산방리의 밑에 있으니 방하리라 했고, 1913년 처음으로 면사무소를 두었으며 일본인의 입주가 늘어 1928년 하둔리로 옮겼다.

○ 죽전마을
둔덕천의 지류로 죽전천이 있고 계곡 따라 윗대밭골 아래 대밭골이라 부르며 동쪽은 답답골재를 넘어 거제면 송곡으로 가는 큰 길이 있었고 동남은 소랑개재를 넘어가는 좁은 골짝 마을이다.

○ 공주샘
방하마을 동편에 있는 찬샘으로 의종왕의 공주가 좋은 물을 찾아 자주 다녔다해 공주샘이라 불렀다.

○ 고려무덤
의종왕이 정중부의 경인난으로 군기감(軍器監)에 수감되었다가 거제로 쫓겨올 때 추종하던 백관과 호위군이 수 없이 따라왔으며 왕이 복위를 꾀해 경주에 나갔다가 정중부가 보낸 이의민에게 시해 당했고, 명종 26년(1196년) 판병부사(判兵部事)였던 이의민(李義旼)이 삼족참형될때까지 27년간 개성(開城)으로 환도하지 못하고 거제현(巨濟縣)에 살고 있었다.  늙은 배관이나 가족들이 죽었으니 방하(芳下)마을 아래쪽 고름등에 고려장지를 설치한 곳이 고려무덤이다. 1950년 한국전쟁때 서울의 대광중학교(大光中學校)가 피난와서 학교를 건설하자 그릇, 칼, 수저 등이 많이 발굴됐다.

○ 답답골재

둔덕에서 읍내 서부로 통하는 큰길로 윗대밭골 깊숙히 올라가 소랑고개를 지나 송곡고개에 이르고 급경사의 산길을 숨가프게 오르고 내리니 답답골재라 했다.

 

○ 돌비석거리
 윗 아래 대밭골 사이에 있는 돌부처의 비석으로 옛날 고기잡이 갔던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비석이 되었다해 남녀 한쌍의 부처 비석이 있었다.

○ 둔연들
 방하마을 아래의 넓은 들판으로 둔덕천 옆에 찬물이 솟아오르는 연못의 맑은 물을 논에 대어 풍년을 가져오니 둔연들이라 이름했다.

○ 매주산(부엉이 바위)
아래 대밭골 앞산으로 높이 209m에 삼각점이 있으며 의종왕이 쫓겨올때 보물을 많이 가져와 신하들이 구슬을 묻었다고 이름했으나 알길이 없다.

○ 삿갓배미
아래대밭골 서쪽 경사가 심해 비가 올때게 삿갓을 벗어 놓았더니 논 한뱀이 없다해 소란을 피우다 삿갓을 들어보니 그 밑에 작은 논 한도가리가 있어다는 것이다.

○ 식기도가리
방하마을 동쪽에 있는 논으로 1885년 을유년 흉년때 밥 한그릇과 바꾸어 굶주림을 이겼다는 전설의 논이다.

○ 장갓재
 방하마을 동쪽 윗대밭골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로 장가들때 가마타고 오고 가는 것을 보니 장갓재라 하고 거제읍의 장터에서 삼십리를 걸어오다 밤이 늦어 도깨비를 만나 장거리와 갓을 잃어버렸다고 장갓재라 전래하는 고개이다.

○ 찬물도랑보
 둔연(屯淵)들에 물을 주는 맑은 찬물이 용출하는 도랑보 이다.

청마기념관
 둔덕면 방하리 505-1
 산방산 입구에 자리 잡은 청마기념관은 인간생명의 의지를 추구한 1930년대 문학인, 생명파 대표 시인인 청마 유치환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그 업적을 고양하기 위해 2008년에 건립되었다. 그 옆에는 1908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한 아담하고 포근한 초가집의 청마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청마는 부조리한 패덕의 시대를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생 고뇌했고 그의 시는 의지와 소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과 시를 통해 힘든 일상에서 지친 마음이 잠시나마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산 방 리
 본래 거제부읍지에 영조 45년(1769년) 산방방으로 고종 32년(1895년) 방하, 죽전리가 분리되었고 1915년 법정리가 됐다. 큰마을 대몰, 산방산 밑을 절골이라 부르며 방하리와 사이의 밭들에 새몰이 새겼고 거제명산 산방산을 배경으로 이름했다.

○ 산방마을
 산방마을은 본래 대몰이라 했는데 산방산 밑이라 산방이라 했다.

○ 갈미보
산방의 서북쪽끝 둔덕천을 가로막아 마을앞 큰 낸들에 물을 공급하고 중간지점에 물레방앗간이 있었으니 1945년 해방전까지 둔덕평야의 유일한 도정하는 방앗간이었다.

○ 귀절암
 산방산 중턱에 옛날의 절터와 미륵이 남아 있어 이는 아름다운 절벽 밑에 자리한 절이었다.

○ 매바위
무제터 위에 매를 닮은 바위가 있고 그 앞쪽산 줄기에 꿩모양의 등성이가 있어 꿩을 잡으려는 형상이다.

○ 무제터
 산방산 정산은 시게의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서편 봉우리의 바위굴에서 물이 흐르는 곳에 가뭄때마다 기우제를 지내고 있으며 내려올때 또는 삼일이내에 꼭비가 온다고 전래한다.

○ 보현사(普賢寺)
 산방산의 부처굴 밑에 옛날부터 절이 있었고 1936년 대덕사를 창건하고 통영 용화사의 포교소를 삼았는데 1954년 5월에 절골마을 뒤로 옮겨서 보현사라 한다.

○ 부처굴
대덕사에서 올라가면 약 20평되는 동굴이 있고 박쥐가 서식하며 삼신굴이라 부르며 삼존석조좌불이 있었으나 해방후 등산객의 증가로 석가모니불의 머리가 떨어졌고,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의 돌부처는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 산방산
 둔덕면 산방리
 둔덕면 동편에 위치한 산방산(해발 507.2m)은 서쪽으로 고려 의종왕이 거처했던 우두봉산과 마주하고 있으며, 산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명시인 청마 유치환선생의 생가(生家)가 있고,산골짜기에는 보현사가 자리잡고있다. 산 정상부에는 암석으로 된 두개의 봉우리가 형제처럼 우뚝 솟아 사방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이들 암석은 능선을 따라 산중 복부까지 이어져 내려 오면서 군데군데 튀어나와 작은 바위 봉우리를 만들고 있다. 그외 아랫부분은 푸른 해송림으로 감싸고 있어, 이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방산이 바로 거제의 명산임을 직감할 수 있다. 산 정상부 주변에는 철쭉, 산철쭉, 진달래 등 철쭉류가 많아 봄이면 철쭉꽃으로도 유명하다.

① 산방아래소류지→보현사(15분/0.5km)→부처굴(10분/0.4km)→옥굴(10분/0.3km)→오색터(5분/0.1km)→정상(10분/0.2km) 총 50분/1.5km소요
② 봉은사→뿔지국(25분/0.8km)→정상(10분/0.2km) 총 35분/1km소요
③ 옥동마을→옥산재정상(45분/1.6km)→임도(1시간20분/2.7km)→거북바위(30분/0.9km)→ 정상(10분/0.2 km) 총 2시간45분/5.4km소요
④ 옥산마을→옥산재정상(1시간25분/2.8km)→임도(1시 간20분/2.7km)→거북바위(30분/0.9km)→정상(10분/0.2km) 총 3시간25분/6.6km소요
⑤ 상죽전→죽전상소류지(55분/1.9km)→무지개터(45분/1.6km)→오색터(5분/0.1km)→정상(10분/0.2km)→ 총1시간55분/3.8km소요

산방산비원
 둔덕면 산방리 197
 거제 산방산 비원은 거제대교를 오른쪽으로 10분여 달려오면 고려 의종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거제 둔덕면에 있습니다.
산방산 자락 3만여평에 자리한 거제 산방산 비원은 별천지를 연상케 합니다. 시시각각 앞다퉈 피는 1천여 각종 야생화는 아름다움을 초월, 눈이 부실 정도 입니다. 한국 현대 예술/문화의 거장 동랑(유치진), 청마(유치환)의 생가가 있는 문화마을. 둔덕면 방하리 윗편에 위치한 거제 산방산 비원은 각종 야생화와 희귀식물들이 어우러진 수목들의 천국입니다.
거제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방산 숲 속에 자리한 이곳 거제 산방산 비원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태고의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온갖 산새들의 울음소리에 어우러진 맑은 물소리를 따라 산방산을 휘감아 도는 운무속에 싸인 거제 산방산 비원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을 연상케 하고, 옥굴에서 흘러내리는 약숫물 계곡에는 참게와 가재, 고동을 비롯한 메기와 붕어 등 온갖 민물고기가 뛰놀고 있어 동심의 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


○ 오색토
산방산을 일명 삼봉산이 라고 정상에 분지를 형성하고 있으니 봄철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가 수억년 쌓여서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고, 검고 다섯색갈 흙이 차곡차곡 쌓여 있고 왕새풀이 무성하다. 이곳을 천하 대명지로 알려져 보름달밤에 암매장을 하면 대한가뭄이 계속되었으니 온 동민이 올라가 그 암장묘를 찾아 발굴했다고 전래되고 있다.

○ 옥  굴(玉  窟)
고려 원종 12년(1271년) 왜구침범이 극심해 거제현민은 정든 땅을 버리고 거창의 가조현으로 모두 갔으나 옥씨 일가는 피난가지 못해 산방산 중간암벽 놀이 200m되는 동굴 속에 들어가 1392년 조선 창건 때까지 숨어 살았다고 전래한다. 세종 5년 태평성세로 거제도민이 사등성으로 돌아와 보니 피난못간 사람이 153호 423명으로 세종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 용수골
 둔덕천 옆 산방들 아래에 맑은 찬물이 용출하니 이를 용이 목욕하고 승천했다 하며 용신제 지낼때 이물을 사용하며 건너 마장마을 사람등이 겨울철 식수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간이 상수도가 설치 됐다.

○ 중산골
절골마을 동쪽 깊숙히 들어가면 옛날 산방산절의 노승이 입적하면 화장해 사리를 채집하고 부도탑을 세웠다는 참나무 화장터가 있었다.

⊙ 시 목 리
 둔덕골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위는 상둔리이고 밑은 거림리로 양지 바른 마을이다. 영조 45년(1769년) 고려 의종왕이 쫓겨와서 방목해 군마를 길렀으므로 시목이라 전래되고 있고  아랫마을이 거림치방의 마방이었기 때문에 시목이라 불렀다. 고종 32년(1895년) 새몰과 점들을 상둔덕방에 속하다 상서리로 아래는 감나무골이라 해 시목리라 했으며 1915년 시목리로 법정했으며 1942년 부락구제로 상서와 시목이 나눠지고 1961년 행정리가 됐다.

○ 상서마을
상둔덕의 서쪽을 새몰 둔덕천동쪽에 점들이라 하며 두촌락을 합쳐서 상서마을이라 한다.

○ 시목마을
기성현때 국마를 사양하던 마장마을의 위에 넓은 초원을 형성해 목장을 지켰다는 시목이었으나 원종 12년(1271년) 왜구의 침범으로 거제도민은 모두 거창으로 피난가 현도 없어지고 그 뒤 감나무를 식재해 시목이라 했다고 전래한다.

○ 도적골재
유지나무골에서 상서의 북쪽을 올라 지석으로 가는 십리재로 상서의 등성이에 오르면 오량곡이 깊숙히 들어와 이곳을 가로 가는 길은 하늘만 바라보는 울창한 숲속으로  도적들이 출몰해 금품을 탈취하니 이 재를 도적골재라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다니던 길이었다 한다.

○ 오양치
유지마을 네거리에서 서쪽의 통영으로 사는 대로이며 상서의 새몰을 지나 등성이에서 오양성으로 내려가는 직선길이기 때문이고 오늘에는 육지의 송전탑만 등성이 마다 높이 서있고 일명 큰 재로 높이 302.7m에 삼각점(三角点)이 있다.

○ 점  들
상서의 동남쪽 둔덕천의 구비건너에 있는 들판의 세거리 길가에 풍구인 풀무의 대장간을 차려놓고 온갖 농기구를 만들어 파는 점포가 있었고, 길손들이 쉬어가는 주막도 있었다 전한다.

○ 팥죽논
1885년의 큰가뭄으로 을유년 흉년때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먹었다는 논이 시목마을 동쪽에 있다.

○ 현령곡
시목과 마장의 경계를 목꼴이라 하며 연중 맑은 물이 흘러 기성현때 현령이 별장을 짓고 목욕을 했다는 곳이 있다

⊙ 상 둔 리
둔덕면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둔덕천의 원류지로 영조 45년(1769년) 상둔덕방이라 했는데 고종 32년(1895년) 유지와 옥동리로 나뉘었다가 1915년 상둔리로 법정되면서 자연촌락으로 윗솔, 덕리, 유지나무골, 함덕골 등이 있고 기성현에 상하 양둔을 두었으니 상둔덕(上屯德)이름했다.

○ 옥동마을
산방산의 음지에 위치해 윗골, 골옥산으로 불렀고 건너 마을을 양지몰 아래 마을을 큰마을 덕리라 하며 옥산고개 밑이고 윗골 뒤에 옥녀봉의 산이 있어 옥동이라 했으나 의종왕이 쫓겨왔을때 죄인의 감옥이 있어 옥토라 전해지기도 한다.

○ 유지마을
남으로 하둔덕 동으로 옥산 서로 지석 북으로 사등으로 가는 네거리에 옛날 장흥이 있었고 쉬어가는 길손을 위해 버드나무숲이 있었으니 버드나무골이라 한다.

○ 깨금치재
유지마을에서 북으로 사등으로 넘어가는 재로 산에는 깨금나무가 자생하며 그 열매는 호두같이 먹기도 하고 옛날 늦은밤에 도깨비를 만나자 이빨로 깨금알을 깨물자 딱하즌 소리에 도깨비가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의 고개이다.

○ 누룩정들
 버드나무골 남쪽에 있는 큰들로 정자나무인 느릅나무가 있었고 누룩정 보가 물을 대어주고 있다.

○ 덕  리(德  里)
 윗골의 양지 아래에 큰 마을을 덕리(德里)라 한다.

○ 명매기 바위
덕리 동북쪽에 있는 바위로 명매기과에 딸린 등이 흑갈색이고 허리에 흰빛 띠가 둘리고 턱 아래는 암갈색인 제비모양의 좋은 새가 서식하던 집이 있었다.

○ 벼락바위
윗골 동남쪽 산방산에 있는 큰바위에 사귈수 없는 두남녀가 올라가 사랑을 속삭이자 갑자기 천둥번개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큰바위를 두개로 갈랐다는 전설의 바위다.

○ 옥산재
 유지나무골 네거리에서 동으로 윗골을 지나 거제읍내로 가는 대로이며 재를 넘으면 옥산리이므로 옥산재라 한다.

○ 옥녀봉
산방산과 옥산재의 높은 능선밑에 윗골마을 뒤 독메가 있으니 이를 옥녀의 몸과 같다해 이름했다.

○ 함덕마을
유지나무골 서쪽 밭들에 함텃골이라는 큰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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