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예비군은 1968년 1월21일 북한 공작대 김신조 일당 30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사건 후 동해에서 발생한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반공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탄생됐다.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초 경상남도 하동을 순시하면서 한 연설에서 향토예비군 창설의 의지를 밝혔다. 1968년 4월1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창설식을 통해 우리나라에는 약 250만명의 향토예비군이 탄생했다. 향토예비군 임무는 국가 비상사태 시 현역 군부대의 역할, 무장공비침투에 대한 지
1971년 장목면 시방리에서 촬영한 베 짜는 사진이다. 대청마루에 베틀을 차려 놓고 삼베를 짜고 있다. 이 시대만 해도 시골에서는 삼·모시를 심어 실을 만들어 직접 옷감을 만들었다. 가을부터 겨울에는 무명 옷감을 짜고, 봄부터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를 짠다. 옷감을 만들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예전에는 먹고 자고 입는 것을 모두 자력으로 이뤄냈다. 그럴 때 결혼은 중매결혼을 했는데. 신부로 제일 중요한 덕목이 길쌈해서 베 짜는 일이다. 일 잘하는 여자가 신부감으로 제일 가치가 있었다.현대 사람들은 베
1976년 거제관광 팜플릿 제작 차 내도에 갔다가 마을대표인 최동수씨가 흑염소를 몰고 뒷산으로 오르는 장면이다. 이때 내도에는 28가구가 살았고. 1980년에는 26가구 68명이 살았다.내도마을은 남쪽으로 외도·해금강이 있고, 북쪽으로는 공고지가 있다. 뒷산 자락에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면서 산에 염소를 풀어 방목을 했다. 어업을 위주로 하면서 염소를 방목해 키우는 것은 산에 풀이 많이 있고, 염소를 풀어놔도 달아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당시 해상교통은 구조라에서 다니는 도선이 있었다. 작은 어선을 도선으로 만들어 운행
우리나라 전통 가옥은 한옥이다. 한옥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있는데 기와집은 부유층이나 관공서 건물과 재실 등이 많다. 초가집은 서민들이 사는 집이다. 이 사진은 1970년 거제면 법동마을에서 부인들이 초가집에 이을 이엉을 엮고 있는 모습이다.늦가을 따뜻한 마당가에서 할머니 두 분이 이엉을 엮고 있다. 주위는 엮어놓은 이엉이 있고, 청마루는 가을에 타작한 곡식 가마니가 있다. 황금빛의 볏짚이 마당에 깔려 있고, 햇살이 포근히 내려오는 마당에서 이엉을 엮고있는 모습이 너무 편안하고 정감이 간다.벼농사가 끝나면,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
유공광구소호(有空廣口小壺)또는 유공소호(有空小壺)라고 불리는 이 토기는 대략 5C전반에서 6C초까지 발견되는 것으로,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백제지역과 가야지역에서 출토된다.일본에서는 스에키(須惠器)중 '핫소'라고 불리는 토기와 형태가 비슷해 당시의 교역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다.입이 넓고 몸통에 원형구멍이 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닥은 평평해 세워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주변은 둥글게 처리돼 있고 회색의 도질토기이다.일본에서 발견된 비슷한 토기의 구멍에 깔때기가 꽂혀 출토된 예로 보아 주(전)자의 용도로
1975년경에 촬영한 지세포 마을이다. 항구주변에 마을이 형성돼 농업과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했다. 바다 앞쪽에 대마도가 50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1470년 지세포 동남쪽 산록 바닷가에 성을 축성했다. 이 성은 거제칠친에 속한 성이다.1769년 방리 개편 때 지세포 방이 됐고, 1889년 6월1일 도령 20호로 지세포, 회진, 교항, 선창 4개리가 됐다. 그해 11월 한일통어장정이 조인돼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어업을 하러 올수 있게 됐다. 거제도에서는 지세포와 구조라에 제일먼저 일본 어민들이 들어와
1972년 새마을사업으로 도로를 개설하고 있는 이 도로는 장목 서구에서 군항포를 지나 하청을 가는 도로로, 고현~연초~하청~장목으로 가는 지방도로다.새마을사업으로 도로가 확장 개설되기 전에는 차가 한 대도 다니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때의 교통은 해안으로 어선을 타고 다녔고, 산을 넘어 이웃마을로 걸어다녔다.도로 개설을 위해 장목 서구마을 사람들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고, 지게에 흙과 돌을 져다 나르며 사람의 힘으로 길을 만들었다.새벽종이 울릴 때 나와 해가 져 어두울 때 집으로 돌아갔다. 꼬불꼬불하던 도로를 곧게 해 2차선으로 만
남부면은 거제도의 남쪽 해안에 있다. 757년 경덕왕 때 거제군의 속현인 송변현이 남부면 다대리 였다. 고종 32년(1895) 칙령 제98호로 동부면에 속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후 이 지역의 저구·다포지역에 악질 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1958년 4월1일 동부면 지역의 동남쪽 해안의 10개 마을을 관할하는 동부면 저구지소가 생겼고, 이듬해 2월20일 저구출장소가 설치됐다.1968년 12월31일 건설부 고시 제164호로 일운면 서이말등대부터 대소병대도 주변 일대가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됐고, 1970년
제주해녀가 거제에 온 역사는 정확히 기록된 것이 없다. 구전에 의하면 1889년 한일통어장정이 이뤄진 후부터로 추정한다. 여자들이 바닷가에서 해조류를 채취해 식량으로 할 때는 고려시대부터로 기록돼 있다. 그러다가 해조류가 귀해지면서 물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왕래하면서 어업을 할 수 있는 통어장정이 1889년에 이뤄지면서, 일본 어민들이 대거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거제도는 어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제주해녀가 거제도에 온 시기는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개방문화가 있을 때다. 1930년 전후로
마제석검은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며 지배계층의 상징물로서 의미가 크다.청동기시대라는 명칭으로만 보면 마제석검은 석기시대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청동기시대의 생활용품은 주로 신석기시대의 것을 사용하고 청동제품은 의식이나 장식용품등으로 한정돼 사용된다.철기시대에까지 사용된 흔적이 있으나 철의 사용이 광범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만들어진 과정은 오르도스 동검 모방설과 중국식 동검 모방설, 비파형 동검 모방설이 있으나 마제석검은 러시아 연해주·일본 큐슈지역과 한반도에서만 출토되고 그중 한
절구통은 곡식을 찧는 농기구의 일종이다. 절구통 외에도 곡식을 찧는 기구는 디딜방아·연자방아·통방아·물레방아 등이 있다.그 모습들은 저마다 다르고 이용하는 방법도 다 다르다. 절구통은 쇠절구·돌절구·나무절구로 구분을 하지만, 그 형태나 사용하는 방법은 곡식이나 떡 같은 것을 찧는 도구다. 절구는 1980년 후반기까지도 시골마을에서 사용했다.이 사진은 일운면 내도마을에서 1975년경에 촬영한 사진이다. 그 당시만 해도 절구통이 있는 가정은 잘사는 집이었다. 겨울에 찹쌀떡을
흑요석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청동기시대에도 발견된다. 점성질의 용암이 급격히 냉각될 때 생겨나며 유리보다 강도가 약하다.준 보석으로 검은빛깔의 광택이 있는 화산암으로 아이슬란드의 헤클라 산, 이탈리아의 이졸라 리파리·미국 와이오밍주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옵시디언 클리프가 세계적인 흑요석 산지로 알려져 있다.무기·장신구와 떼어낼 때의 날카로운 면을 이용해 자를 때 사용하는 여러가지 도구로 이용됐다.부산이나 남해안 일대에서 가끔 발견되는 흑요석은 일본의 큐슈지방의 것과 성분이 같다. 따라서 백두산계통
누에는 애벌레로 자라서 고치로 실을 뽑아 명주옷을 만든다. 명주옷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얇으면서 보온이 뛰어난 옷감이다.1960년대부터 정부시책으로 누에치기를 장려했다. 이때 지역마다 누에치기 학교를 설립했다. 1960년대 말 거제도에서는 연초면 송정리에 누에학교를 설립해 누에치는 교육을 하다가 1973년께 없어졌다.가을에 누에씨를 받아 봄에 알을 까게 하고, 봄에 받은 씨는 가을에 알을 까게 했다. 누에는 일 년에 두 번 키운다. 누에를 키우는 잠실 벽쪽에 층층칸을 만들어 누에가 자랄 수 있는 섶을 만든다.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는
계룡정 궁도장은 1975년 봄에 신봉권·김해정씨가 거제군 공보실에 와서 문화를 담당하는 "이승철 주사가 나서서 거제 궁도장을 하나 만들어라"고 해서, 정태영 군수를 만나게 했다.정태영 군수가 이 주사(이승철)가 나서서 도와주라고 해, 그 다음날 신봉권·김해정씨와 거제군 공보실 차를 타고 통영에 가서 충무 열무정 엄수영 사두와 지철훈 사범을 만나 협조를 구했다. 다음날 공화당 사무실 마당에 습사(習射)용 대나무를 꽃아 놓고 활 쏘는 연습을 시작했다.이때부터 신봉권·김해정·원길상&mid
이 사진은 피난민 학생들이 장승포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야외 공부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1950년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다.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 까지 후퇴를 했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 맥아더 장군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9월28일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10월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1950년 11월 말 1만5000여명의 미 해병대 1사단이 압록강 근처의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이때 30만의 중공군이 장진호를 점령해 진격을 해 오자, 미군이 철수를 하기 시작했
이 사진은 1976년 초 겨울에 촬영한 사진이다. 하청면과 연초면을 경계로 하고 있는 석포마을에 있는 시골집이다.산비탈에 있는 집 마당가에는 막돌 담장이 쌓여 있고, 고기를 담아온 항아리와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고기를 담고 있는 할머니가 있다. 담장 앞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가마솥에서 고기를 삶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포근한 겨울옷을 입고 불을 지피고 있는 할머니와 말린 고기를 담고 있는 할머니의 표정이 넉넉하고 포근해 보인다. 가마솥 옆에는 겨울을 지내기 위해 뒷산에서 해온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사진 속에 보이는 장면의
거제도는 기후가 온화해 열대식물이 잘 자라는 곳이다. 1965년 일운의 김수관씨가 제주도에 가서 밀감 묘목을 구해와 지세포에서 재배를 했다.밀감 재배가 잘돼 거제 전역에 널리 보급됐다. 이때 학동 내촐을 비롯해 따뜻한 양지쪽에는 밀감을 재배했으며, 수확도 괜찮았다. 겨울에는 한파를 이겨내기 위해 짚이나 가마니 같은 것으로 바람막이를 해뒀다. 양지쪽 밭과 산비탈에 밀감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거제서 생산되는 밀감은 다른 지역보다 맛이 더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밀감재배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다.거제가 밀감농장으로 적지란 말이 나돌던
거제군청이 있었던 고현지역이다. 이 사진은 1960년 헬기를 타고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중앙에 보이는 큰 건물은 그때 거제군청이다.군청이 있는 곳 주변에는 전답이고 서쪽 길가에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서문마을이다. 당시는 고현 시가지가 허허벌판이었다. 포로수용소가 생길 때 제일 먼저 고현에 수용소가 생겼고, 그 다음 해명마을과 수월·양정이었다. 그때 있었던 포로수용소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과 함께 대부분 없어졌다. 포로수용소를 뜯어다 집을 지었다. 고현과 장평·수월 지역 주변과 문동·
이 사진은 1969년 여름에 촬영한 장목 상유마을 사진이다. 상유마을은 거제도 북단 끝 대봉산 아래 해안가에 있는 마을이다.이곳에 윗마을을 상유라 하고, 아랫마을을 하유라 한다. 이 마을의 생활권은 부산·진해·마산이다. 이때만 해도 통통배나 노 젖는 배, 돗단배로 다녔다. 장목면까지는 대봉산 산자락을 넘어서 농소, 간곡을 지나 걸어서 갔다. 마을 아래쪽에 바람을 막아 주는 방풍숲이 있고, 해안가의 전답에서 파란 잎의 곡식이 넘실댄다.어촌 마을이라 하지만 아늑한 정감이 흐르는 마을은 함석지붕으로 된 집이 몇
이 사진은 1965년 장승포 위쪽 능포에서 내려오는 계곡에서 빨래하는 장면이다. 당시 장승포와 능포는 바닷가 한적한 마을로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농경시대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어패류 보다 식량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농사를 위주로 살았다.장승포는 1889년 한일통어장정이 생긴 후 일본어민들이 들어와 거주했다. 해방 후 일본사람들이 물러가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북한 피난민들이 많이 살다가 부산·서울 등지로 가고 텅 빈 마을이 됐다.옥수동에는 두서너 집이 살았고, 능포는 20여호, 장승포는 마전을 포함해서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