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에 촬영한 덕포마을이다. 옥포고개를 지나 장목면 대계마을로 가다보면 있다. 뒷산에는 덕포봉수대가 있다.산록 해안가 전답에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곡식이 있어 계절은 봄이다. 전답사이와 활대처럼 굽어 있는 해안가 모래사장 주변에는 낡은 함석지붕 집이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다.옛날의 시골 해안풍경을 보면서 그 시절의 생활문화를 되돌아본다. 마을 입구에는 소나무숲이 있다. 이 숲은 여름쉼터로 사용해왔다. 마을 앞은 옥포항이다. 해안가로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고, 고운 모래사장과 옥수같이 맑은 물이 있는 덕포해수욕장이다.
이 사진은 1971년 4월8일 거제대교가 개통 되고 난 몇 년 후 대교위에서 견내량 마을과 한남수산을 촬영한 것이다.한남수산은 1965년 견내량을 건너는 거제대교가 착공되고 다리공사가 시작된 후 견내량 지역이 발전 될 것이라고 생각한 서모씨가 만들었다. 서씨는 호남에서 수산업을 하다가 미래 성장가능성이 높은 견내량 주변 덕호마을로 와서 수산물 가공공장을 시작했다.마을에 가공공장이 생기자 어민들은 악취 등의 이유로 반대했다. 서씨는 마을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견내량 해안가로 와서 임시로 집을 지어 수산업을 계속했다. 거제대교 공사가
1987년 11월5일 거제시 동부면 소재지 산양에서 남부면으로 가는 도로확장공사 기공식을 하는 장면이다. 백승두 군수가 기공식에 대한 인사와 공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산양에서 남부로 가는 도로는 세 갈래로 돼 있다. 중앙으로 가는 도로는 부춘을 지나서 율포고개를 넘어가고, 연담에서 평지를 지나 학동으로 넘어 가는 도로가 있다. 또 하나는 오송마을을 지나 가배로 가는 길이다. 남부로 가는 도로는 6.25 전쟁이 나고 나서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고, 악질 포로를 저구에 수용하면서 부춘~율포 도로가 만들어졌고, 다른 도로는 그 후
거제시 일운면 옥녀봉 북단, 아주지역 해안 아늑한 골자기에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장승포읍에 속한 아주리 관송(貫松) 마을이다.옥녀봉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골자기에 넓은 들이 있고, 주위는 소나무가 있다고 솔송(松) 사이간(間)자를 써 간송이라 한 것이 어원이 변화해 관송이라 했다.이 사진은 대우조선소가 들어오기 전 1971년 가을에 촬영했다. 아주리는 757년 신라경덕왕 때 아주현이 있었던 곳으로 옥포만의 남쪽 아주 해안 지역이다.바다에 접해 있으면서도 시골마을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마을이다. 산 좋고 물 좋고 넓은 들이 있는 곳
이 사진은 1970년 초겨울에 찍은 사등면 금포마을 해안 전경이다. 노 젖는 배와 작은 통통배가 부둣가에 대여 있다. 선착장이 너무 작아 배를 다 대지 못하고 선착장 주변에 서로 엉켜 있다.앞 바다에는 양식 어장이 있고, 옆 산은 흙이 무너진 채 벌거숭이산이 돼 있다. 바다 앞쪽은 하청 앵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산자락 해안을 돌아가면 하청만과 칠천도가 나온다. 장목을 경유해 부산으로 다니는 뱃길이다.금포항 서쪽은 성포항이다. 앞 바다에서 잡은 어패류와 양식장에서 생산되는 어패류를 분리하고 저장·관리하는 함석지붕이 바
향토예비군이 보리를 베는 모습이다.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때는 1968년이다. 예전 북한 민족보의성 정찰국 요원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시킨 간첩단 사건이 있었다.이 사건은 경찰검문에서 정체가 들어나 29명이 사살되고 한 명은 도주·한 명은 자수했다. 이어 동해에서 발생한 미국의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1일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초 경남 하동 연설에서 향토예비군 창설의지를 밝혔고, 5월에 '향토예
거제시 남부면 다포 마을에서 해안선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바닷가에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이 여차(汝次)마을이다. 여차마을이란 이름은 다포마을 다음 등넘어 물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외진마을인데, 새마을 관광도로로 개설하고부터 관광지로 변모했다. 마을 앞에 몽돌자갈이 깔려 있고, 대소병대도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파도를 막고 있다.대소병대도 섬 주변과 청정해역의 돌틈에서 자생하는 돌미역은 3∼4월부터 6월까지 채취해 몽돌위에서 건조시킨다. 이곳에서 나는 자연산 돌미역은 쫄깃쫄깃하고 감칠맛과 오돌오돌 씹히는
이 사진은 1972년에 촬영한 하송정 마을이다. 이때만 해도 평온한 시골 마을처럼 주위는 얕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산에는 솔숲이 우거져 있다. 마을 앞 논에는 곡식이 자라고, 좁은 하천이 마을 앞으로 흐른다.송정 아랫마을에서 천곡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 있고, 윗마을은 옥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송정고개다. 여기서 덕포·외포로 다녔던 옛길이 있다. 산허리를 돌아 바닷가로 내려가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잡초와 수목이 울창해 흔적만 겨우 남아있다. 이곳에 학교와 상가 주택이 형성됐다.송정고개에서 김해공항으로 가는 헬기장이 있었
거제는 산자수려한 아름다운 섬으로 사면으로 얕은 바다가 있다. 자갈모래로 형성된 바닷가는 바윗돌을 비롯한 자연적인 환경이 어패류가 잘 자랄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대우·삼성조선소가 들어오기 전에는 바닷가에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고 옛 모습대로 잘 유지돼 해안가 마을에서는 많은 어패류를 생산했다.이 사진은 1971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1889년 한일 통어장정이 맺어진 후부터 일본인들이 거제연안으로 들어와 어업을 했다.그때의 어장이 1950년 이후까지 능포항을 비롯해 여러 곳 남아 있었다. 거제연안은 어패류가
석전놀이는 양쪽에 삼각대 나무 기둥을 세우고 줄을 걸어 가운데에 길이 2m·직경 6㎝의 철봉(鐵棒)을 매달아두고, 20m 거리에서 돌을 던져 쇠봉을 마치는 경기이자 놀이다. 개인 또는 5인 단체전으로 1인 10개씩의 돌을 준비해 1회에 5개씩 궁도(弓道) 방식으로 순번에 따라 돌을 던졌다.이 석전대회는 기생의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며 명중하면 다음과 같이 기생이 노래를 부른다.전반전 5개의 석전으로 첫 번째 돌이 명중하면 '하모(何某) 1시(화살矢)초에 관중(貫中)이요', 두 번 명중하면 '하모 2
아주리 아양마을은 옥녀봉 북단 아주해안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이 사진은 1970년 봄에 촬영했다.아양마을은 옥녀봉이 기러기처럼 양쪽 날개를 펼치고 북쪽을 향해 날아가면서 아주 바닷가에 포근히 내려 앉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기러기 아(鵝)자를 써 아주라 했고, 아주의 양지쪽 마을이라 해 아양리라 했다.이 지역은 옥포항과 아주해안이 접하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비옥한 농토가 있어서 일찍부터 농어업으로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757년 경덕왕 때 이 지역에 아주현(鵝州縣)이 생겼고, 1769년에 관송과 당등산 목에 있는 마을을 당
1973년 새마을사업으로 어촌마을 방파제 공사를 하기 위해 마을 부녀자들이 동원돼 물동이에 흙을 담이 바닷가로 걸어가는 모습이다.마을 뒷산은 민둥산으로 산에서 나는 나무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마을과 가까운 곳은 개간해 밭으로 사용했다.해안가 마을의 작은 집들은 조개를 엎어놓은 것 같고 해산물 가공공장이 있다. 겨울날씨는 맑고 하늘은 청명하다. 마을 부인들이 두터운 한복을 입고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양철물동이에 흙을 담아 한 줄로 길게 걸어가는 모습이다. 모두 흰 고무신을 신고 걸어간다. 두툼한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거제 최초의 유치원 졸업식을 담은 사진 한 장이 그때 그 시절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장승포 신영길(79)씨가 보관하다 마전유치원 진영주(81) 원장을 통해 거제신문에 전달된 이 사진은 거제 최초의 유치원인 장승포유치원 졸업식 때 촬영한 것으로, 거제 교육의 선구자이자 진영주 원장의 선친이며 장승포유치원 설립자인 故 진도선(1918년 생) 옹의 모습도 보인다.진도선 옹의 넷째 딸인 영주씨는 가운데 키가 큰 분이 자신의 선친이며, 당시 갓 결혼한 숙부‧숙모도 함께 뒷줄에 서 있다고 증언했다.또 두 살 터울인 언니 혜주씨의 졸업식 사진
1936년 장례행렬과 1949년 동부저수지 건설을 위한 동부수리조합 설치조사 장면을 담은 사진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국산초등학교 김동영 교사가 동부면 시댁에서 찾은 이 두장의 흑백사진은 김 교사가 창고를 정리하던 중 발견했다.장례행렬 사진은 10여개의 만장기를 앞세운 상여와 함께 70여명의 행렬이 뒤따르고 있다. 추수를 끝낸 황량한 들판 뒤쪽에 초가집 한 채와 두 동의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현대식 건물 왼쪽은 당시 신축한 동부면소이며 오른쪽은 동부면사무소 창고다.김 교사의 시부 심광(73)씨는 "동부면사무소 장소는 현재 동남
이 사진은 연초면소재지에서 야부마을 앞을 지나 옥포로 가는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동원된 주민들의 모습이다.옛날 도로는 길이 고불고불한 자갈길로 울퉁불퉁 파여져 있었다.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고 외쳤던 새마을사업이 전국적으로 퍼져 농번기를 제외한 날은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새마을 사업을 했다.이때는 조선시대부터 만들어진 마을의 안길과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자연 그대로 꼬불꼬불하고 협소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사람이 다니기 어려웠다.새마을 노래와 같이 살기 어렵고 못살던 농촌을 농촌사람들이 나서서 새로운 마을로
1945년 광복이후 남북이 분단됐다가 1950년 6월25일 남북전쟁이 일어난 후부터 생활환경이 너무나 어려웠다.1968년 정부방침에 의해 어린이집이 생겼고, 1970년 2월 어린이집이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아, 초창기에는 탁아소(託兒所)라 불렸다.1982년부터 마을마다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새마을 협동 유아원'이 생겼다.이 사진은 장승포 새마을 협동 유아원 어린이들의 졸업식 장면이다. 새마을정신을 이어 받아 전두환 대통령 시절, 1981년부터 정책사업으로 새마을유아원 교육을 실시해 지역마다 새마을 협동 유아원을 운
이 사진은 1970년 가을 경희대학교 원병오 조류학자와 동부면 학동 동백숲에 서식하고 있는 팔색조 자료조사차 갔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이곳은 동부면 학동마을에서 해금강으로 가는 길 아래 해안에 있는 마을이다. 내촐마을이라 한다.노자산 아래 해금강으로 가는 도로 주변에 동백숲이 있고, 집 뒤로는 전답이 있다. 이곳은 농경문화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을 뒤 산록이 따뜻한 곳으로 1960년 중반에 밀감을 재배하다가 유자를 재배했다. 학동 바닷가 언덕배기에 살면서 어업보다 농업을 주업으로 살았다.산에 땔감이 풍족하고, 물&midd
동부면 산양마을은 동부면 소재지 마을이다. 사진은 동부농협 북쪽으로 도로 포장공사와 하수도 공사를 하는 장면이다.흙이 쌓인 길 위로 아기를 엎고 지나가는 여인과 어린이가 뒤따라가는 모습이 옛날의 생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오른쪽 길옆에는 붉은색 함석지붕이 있고. 길옆으로 나지막한 집들이 보인다. 이때는 새마을정신으로 동부면이 자체적으로 공사를 할 때다. 그때의 모습에서 자활적인 생기가 넘친다.동부면은 동쪽에 있는 면이라 해서 동부면이라고 칭했다. 동쪽이란 의미는 983년 둔덕면 거림리에 기성현이 있을 때 기성현의 동쪽지역이라는 뜻
1970년 초반까지도 먹고 살기 어려울 때다. 이때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다. 보리가 익을 때까지 먹을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 어려운 때에 죽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면서 살아야 했다. 아무리 험하고 높은 고개라 해도 이때만큼 지내기 어려운 때는 없었다.밀과 보리는 겨울에 심어서 이듬해 봄에 수확을 한다. 가을에 수확한 쌀이 부족해 보리가 익을 때 까지 지내기가 가장 어려웠다. 그때를 지내기가 어려워 힘든 보릿고개란 말이 생겼다.보리와 밀은 월동작물로, 겨울을 잘 지내야 수확이 좋다. 월동상태는 한해나 습해로 크게
거제도 남쪽 해안가에 있는 다포마을이다. 이 마을 건너편 북쪽은 다대마을이고 동쪽은 해금강, 서쪽은 여차마을이 있다.이 사진은 1978년 가을에 촬영한 사진이다. 물이 나간 다포항은 해안이 다 보이고 누렇게 익어 가는 벼와 신록의 푸른 숲과 청정바다에 둘러싸여 있다.다포마을은 바다에 복주머니가 떠 있는 것처럼 복스럽게 생긴 마을이다. 이 마을은 거제의 남쪽 가라산과 마을 뒤 천장산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포구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어촌이지만 산록에 비옥한 토지가 많아 농어업을 주업으로 살았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지역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