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이 왔다. 지난 여름 우리 사무실 뒤뜰에서 천방지축 뒤뚱거리던 꺼병이가 장끼로 돌아왔다. 꿩은 겨우내 자취를 감췄더니 3월이 되자 보란 듯이 모습을 나타냈다.사흘 전,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난데없이 나타난 큰 새의 자태에 들떠 숨을 죽였다. 탐스럽게 자란 꿩은 추위를 벗은 마른 낙엽을 밟으며 숲 가장자리로 나와 한가하게 걸었다. 청동빛깔을 띤 윤기
거제도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공곶이'는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가파른 내리막의 단상이 여느 길과 달라 마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걷고 싶은 길이다. 그 길로 가면 동백나무 터널 아래로 돌계단이 신기루처럼 펼쳐져 내리막의 진수를 단단히 만끽할 수가 있다. 한 발 한 발 내려가다 보면 하늘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은
한밤중에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곡이 내 무딘 허리를 사정없이 휘감았다. 한 바퀴 빙글 돌건 나는 무도회의 주인공인 양 두 눈을 꼭 감았다. 이런 나와는 달리 음악은 더욱 박진감 있게 들려왔다. 그것이 내 휴대폰 벨 소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도회가 무르익은 뒤였다.귓전에 들려오는 그 음악은 나지막이 새어드는 달빛 사이로 환상의 춤곡인 양 나를 유혹했다. 무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었다.수도원의 어두움이 깃든 복도를 걸어 막다른 방으로 들어갔을 때 유리관 속에 누운 노 수사님의 시신이 있었다. 아흔 여섯 해를 마감하고, 전날 선종하셨다는 노 수사님은 고요히 잠든 듯했다.이승의 거품은 모두 빠지고 요르단 강을 건너기에 가뿐한 몸만 남긴 채 다가올 천국을 꿈꾸는 듯 누워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잠깐
종무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2시 남짓된 낮 시간에 집으로 들어가 홀로 가는 해를 보내는 채비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영화관으로 방향을 바꾼다. 낮시간이니 극장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아는 매표창구로 다가가다가 '미안하다 독도야'가 전광판에 뜨는 것을 보고 얼른 마음을 결정한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 뉴스에서 마침 이 영화
동갑내기 친구들과 서해안으로 1박2일 봄나들이에 나섰다. 봄·가을이 되면 여러 단체나 모임에서 나들이를 갔었다. 또 해마다 각 단체에서 다양한 행사로 계절에 관계없이 나들이를 겸할 때가 있다. 또 문인들의 문학기행은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이뤄지기도 한다. 한때 한창 젊은 30때부터 고향에서 지역 어르신을 모시고 효도관광을 시켜 드리기도 했다. 그
고향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언제나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어느 틈에 눈가엔 눈물이 고이는 것은 왜일까? 강물이 흘러가듯 세월 속에 잊을 수 없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그려본다. 푸른 봄 잎과 노란 가을의 포플러 잎을 함께 마음에 담아 고향에 심고 싶다. 따뜻한 햇볕에 봄눈 녹아내리듯 내 가슴에 몽올몽올 고향의 꽃이 피고 안개꽃처럼 아롱아롱 눈에 어리
배우 차태현은 범접할 수 없는 외모가 아니라서 좋아한다. 그저 웬만큼 생긴데다 유쾌한 성품은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을 만큼 편안함을 준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괜히 미소가 떠오르는 사람이다. 세 아이의 아빠인데 자녀를 재미있게 돌보는 태도도 좋고, 소탈하면서도 찌들지 않고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매력이다. 그러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에 들어갔다. 뜻밖에 만난 '只(다만 지)'자 때문이었다. 거제 장승포에서 지심도로 들어갈 때만 해도 이 '只(다만 지)'자가 나타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지심도(只心島)라는 이름을 역사탐방 안내판에서 읽고 난 후 섬이름에 대한 의미를 가늠하느라 생각을 모았지만 묘수가 없었다. 只, '다만 지' 또는
글을 한 편 써서 부쳐야 할 텐데 하고 제목을 썼다. 그때, 아내가 '그럼, 이제 반을 썼군요'하고 웃는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말이지'하면서 정색을 한다. 물론 이 말은 웃자는 이야기다. 사실은 여자 편이 모든 면에 있어서 남자보다 더 섬세해서 매사에 신중하다. 매사에 남자는 목표지향형이고, 여자는 상황지향형이라고 했다. 옷 한 벌을 살 때
강 시인의 시를 두어 행 읽었더니, 그만 동화되어 내가 설렘에 빠져버렸다. 다정다감한 시인의 품성이 물씬 밴 시 '다솔사 입구에서'였다.'이미 당도해 있을지 모르겠다/만해 이후 만해 같은 시인이' 시인을 잘 알고있는 나는 조곤조곤하면서 열정적으로 느껴지는 그 말투와 표정과 몸동작이 바로 떠올랐다. 다솔사 입구에 들어서면서 그리워, 그리던 사람들을 짚
여름이 무르익는 통영바다와 거제바다를 바라보며 푸르른 녹음 속을 달리던 자동차는 어느새 거제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전쟁문학의 모태가 된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중심으로 특징적인 이순신의 승전지 옥포해전과 기념관, 그리고 세계 제일의 조선소, 바다와 하늘을 가로질러 달리는 아시아 제일의 거가대교,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해금강, 거제의 민속·
2011년 !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늘 맞이하는 세월이긴 하지만 역사가 정해놓은 시작과 반복의 의미가 나에게는 여늬 해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정초(正初)의 기분이다. 올 해는 신묘(辛卯)년으로 풍요와 번성을 의미 한다는 토끼해이다. 특히 올해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다 행운의 금 토끼띠, 혹은 슈퍼토끼해라는 말도있다. 그래서 백화점에는 토끼와 관련된 상품이나
가을 하늘이 유난히 높다. 이런 날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까.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지낼까. 아님 공허한 냉기가 쏟아지는 하늘 덕분에 쓰린 기억 하나 드러내며 보낼까.아는 동생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결혼하기 전 동생은 친정 부모 모시느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러다 결혼하면서는 시할머니 시할아
악어 새끼들의 부화음 같은 그 쉰 듯이 애처로운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나는 것이 낡은 벽시계의 뻐꾸기 울음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냈다. 첫 집장만의 집들이에 들어왔던 뻐꾸기는 수많은 이사 통에 솔방울의 발〔簾〕도 없어지고 창문도 열리지 않는데 목이 쉰 뻐꾸기가 시간마다 속에서 울고 있었다.덩치가 큰 인공지능냉장고가 좁은 주방을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다. 이사 가
1매년 이맘때면 총회에 보고할 결산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결산이 정확치 못하면 많은 일을 해놓고도 오해와 불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을 쓰는 일 중의 하나이다. 사무국장이 준비해온 자료에다 누락된 항목 몇 가지를 추가해서 써넣고 전자계산기로 검산을 해본다. 그런데 계산할 때마다 답이 다르게 나와서 주판珠板으로 계산을 해볼까 하여 찾아보니 없다.결산이
내 나이 예순을 넘어, 옛날 같으면 긴 담뱃대를 물고 덧창문 열고 덕석에 널은 나락에 날아드는 새나 쫓아 보내고 있을 나이. 그래도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연구하는 게 지금 내 자신의 모습이다. 오년 전, 초등학교 동창생인 고분자 물리학박사 J를 떠나보낼 때 왜 그리도 서럽던지. 아들 결혼을 보고 임종하려고 했는지, 그렇게 맞추려고 가족들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고, 한번쯤 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하였지만, 실천으로 옮기는데 4년 가까이나 걸렸다. 가까운 초등학교 운영위원회에서 교육이 도서관 지하 대강당에서 있었는데, 참석하던 날 주차장이 붐빌 것 같아 걸어서 도착하였고, ‘아, 이렇게 가까운데 내가 게을러 도서관에 못 온단 말인가. 내
아침이면 나는 호젓한 논길을 따라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문안을 갔다. 길을 걸으며 조용필의 노래 〈그 겨울의 찻집〉을 곧잘 흥얼거렸다. 나의 18번이기도 한 이 노래가 노랫말도 좋거니와 나하고 어머니 사이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연관이 있어, 더 애창곡이 되었는지도 모른다.어머니께서 기거하는 방에는 장롱 하나가 달랑 놓여 있고, 그 옆에 텔레비전 한 대가
흐릿한 날, 봄비가 내린다. 온 대지는 촉촉이 젖고 나뭇가지는 푸른빛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시작이구나’ 하며 창밖을 내다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반가운 친구의 목소리다. 얼마 만인가!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웬일이냐는 물음에 “저녁 준비하면서 나물 무치다가 너 생각이 나서…, 이렇게 흐린 날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