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은 난장이었다. 18세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정조 24년(1800년) 3월에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과거가 이틀 동안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렸는데 수험생이 무려 21만 5417명이었고, 답안지 제출자는 7만1498명이었다. 그렇다면 응시자의 2/3는 응시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시험은 수험번호에 따라 좌석이 지정돼 있지만 당시에는 먼저 앉으면 제자리였다. 시험문제를 내건 현제판(懸題板)이 잘 보이는 앞자리를 차지하
초등학교 때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방학이다. 그런데 방학이 좋긴 한데 걱정도 있다. 유달리도 많은 숙제 때문이다. 방학 시작 며칠 동안, 모든 숙제를 다해버릴 듯이 설치지만 결국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만다. "뭐, 아직 방학이 많이 남았는데"라고 생각한다.개학날이 가까워지면 바빠지기 시작한다. 몰아쳐서 할 수 있는 숙제가 있는가 하면 없는 것도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일기쓰기다. '밥 먹고 공부하고 심부름하고…' 억지로 지어내는 것을 보면 천재가 따로 없다. 그러나 막상 날씨만은 난감한 문제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
옛날에 성질이 못된 시어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며느리가 밥이 잘 되었는지 보려고 밥알 두 개를 입에 넣자, 시어머니가 보고 어른보다 먼저 밥을 먹었다며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이후 며느리의 무덤가에 붉은 입술에 밥풀 두 알을 입에 문 모양의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이 이 꽃을 '며느리밥풀'이라 불렀다.이팝나무의 전설도 비슷하다. 며느리가 제삿밥을 짓는데 늘 잡곡밥만 짓다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걱정이 되어 뜸이 잘 들었나하고 밥알 몇 개를 입에 넣었다. 마침 그걸 시어미가 보고 제사에 쓸 메밥을 며느리가 먼저 퍼먹었다며 온갖 구박을
숙종 때 거제현령 김대기(金大器)가 고현과 거제읍을 잇는 새 길을 만들었다. '김실령재(김현령재)'다. 그전에는 거제읍에서 고현이나 아주로 가려면 명진과 용산 사이의 계룡산 높은 재를 넘어야 했다.어느 해 큰 흉년이 들었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어머니는 오누이를 시켜 아주 친정집에 쌀을 얻으려 보냈다. 오누이가 고개를 지날 무렵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비에 젖은 여동생의 몸이 오빠의 욕정을 자극했다.견딜 수 없는 갈등을 느끼던 오빠는 동생을 잠시 먼저 보내고 불순한 마음을 품었던 자신을 원망하며 칼로 자기의 성기를 잘랐다. 오빠
불상을 제작할 때 몸 안에 불교의 상징물을 넣고 밀폐시켰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크게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이를 복장유물(腹藏遺物)이라 하는데 당시에는 평범한 물건일지 몰라도 지금은 귀중한 자료가 된다.720년 전인 1302년에 조성한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복장유물 중 창녕군부인 장씨가 쓴 발원문(發願文)이 있다.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내용중에는 '서원하건대 다시 태어날 때는 남자의 몸을 얻게 해주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고려시대 군부인(郡夫人)이란 외명부 종친부인에게 내리는 2품 또는 3품의 작호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석(白石)의 시 '백화(白樺)'의 일부다. 화(樺)는 자작나무다. '백화(白樺)·화수(樺樹)·화목(樺木)·백단(白椴)' 등으로 쓴다. '자작나무'라는 말은 하얀색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 불을 붙이면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우리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어쩜 그렇게 시적인 이름을 붙였을까.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다. 우리나라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의 하나가 유리다. 유리창이 없는 건축물, 유리문이 없는 자동차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처음에는 깨끗하던 아파트의 유리창이 몇년 못가 뽀얗게 얼룩이 져 보기 흉해진다. 그렇다고 누구나 아무 때나 쉽게 닦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높다보니 참으로 위험하고 성가신 일이다. 물청소를 하려고 해도 아래층으로 물이 떨어진다고 야단이니 마음 놓고 물을 쓸 수도 없다.중국에서는 이미 진(晋·265~316년)나라 이전에 유리를 발명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리는 보석만큼 귀한 것이어서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훗날 상서
시는 왜 쓸까요? 인간의 본능에는 표현하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황홀한 상상의 세계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구원·즐거움·삶의 고백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요.'시를 쓰는 이유'라고 하면 시인이 자기 시에 대하여 그 이유를 늘어놓은 것 같지만 이건 좀 다릅니다. 시인 없는 시집의 책제목이 '시를 쓰는 이유'입니다. 총 53편의 시 중에서, 1부는 '공'으로 30편, 2부는 '일'로 23편이 실렸습니다.'공'이나 '일'은. 0과 1입니다. 컴퓨터 언어를 의미합니다. 인공지능 AI가 쓴 시집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염소고삐를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염소가 달리기 시작했다. 고삐만 놓으면 될 일을 신작로를 질질 끌려가면서도 고삐를 놓지 않았다. 무릎이 깨어져 피범벅이 됐다. 그때의 상처진 흔적이 아직도 내 무릎에 남아 있다. 그 후로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동물은 염소였다. 이 나이에도 큰 염소를 보면 섬뜩해진다.중국 양쯔강(揚子江) 이남을 강남지방이라 하는데 하류 쪽에 오(吳)나라가 있었다. 고온다습해 한낮이 되면 무더위 때문에 소들이 지쳐 숨을 헐떡거렸다. 그런데 달이 뜨면 달을 해로 착각하여 소가 숨을 헐떡거렸다
고려 충렬왕 때 대부경 박유(朴褕)가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다. "신하들에게 첩을 두게 하옵소서. 벼슬이 내려갈수록 첩의 숫자를 줄여서 서민은 아내 하나, 첩 하나를 둘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하시옵소서."이 간 큰 남자의 '첩제도' 주장에 대신들은 고민에 빠졌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아내가 무서워 대놓고 찬성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터진다. 연등회 때, 박유가 나타나자 한 노파가 "저 놈이 축첩을 청한 요망한 늙은이다"고 하자 참석한 여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욕을 쏟아 부었다. 고려 여인들의 분노로 결국 이 문제는 유
한 남자가 하느님에게 물었다. "처녀 때는 마음이 곱고 착한데, 마누라가 되면 왜 무서워지나요?" 하느님이 대답했다. "처녀는 내가 만들었지만 마누라는 니가 만들었잖아!"조선시대 유몽인(柳夢寅)이 쓴 설화집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아내를 몹시 두려워하는 판관(判官)이 있었다. 아침에 부인에게 심한 잔소리를 듣고 나왔는데 도대체 나만 그런지 궁금해서 사령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너희들 중 마누라가 두려운 사람은 왼쪽에 그렇지 않으면 오른쪽에 서라!"모든 사람들이 왼쪽에 섰는데 한 사람만 오른쪽에 섰다. 판관은
'최씨 앉은 자리는 풀도 안 난다'고 했다. 이 말은 고려 최영(崔瑩) 장군과 연결시킨다. 혁명에 성공한 이성계에 의해 참수 당하기 전 "내가 평생 한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무덤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 불렸다.'시경' 1권에 '척피최외 아마훼운(陟彼崔嵬 我馬 隕)'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저 풀이 나지 않는 바위산에 오르고자 하나 내 말이 비루먹고 피곤해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최외(崔嵬)는 '풀이 나지 않는 바위산'이다. 글깨나 배웠다는 사람
혼례가 끝난 저녁이 되면 신랑과 신부는 첫날밤을 맞게 된다. 이때 '신방 엿보기'라는 풍습이 있다. 가까운 친척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까지 와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방안을 엿보기 시작한다. 장모가 나와 구경꾼들을 쫓아내지만 그건 시늉일 뿐이다. 그러다 신방에 촛불이 꺼지면 사람들은 모두 알아서 물러났다.요즘 눈으로 보면 고발이라도 당할 일이지만 우리의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이 없고, 풍습의 기원에는 몇가지의 설이 있다.첫째는 조혼의 영향이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첫날밤이 서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
시(市)는 부산시, 거제시처럼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시라고 하면 도시의 형태를 갖춘 인구 5만명 이상인 지역을 말한다. 한마디로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어딘가? 바로 시장(市場)이다. 행정구역 단위인 시(市)는 시장을 말한다.한자 시(市)자가 생긴 것을 보면, 가운데 장대를 세우고 열 십(十)자 모양의 가로대가 있다. 거기에 양쪽으로 수건(巾)이 걸려 있는 상형문자이다. 수건(깃발)에는 가게 이름이나 파는 물건을 적었다. 이런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중국음식점이다. 요즘은 드물지
중학교를 졸업한 형님은 강도짓 하는데는 전문가였다. 그의 동생은 미국대학의 경영학석사학위를 가진 MBA출신이지만 강도짓은 신출이었다. 두 사람은 은행을 털어 크게 한탕할 생각으로 연습하고 훈련해 무사히 많은 돈을 자루에 담아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동생은 얼마를 훔쳤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형님, 가져온 돈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봅시다." 형님이 말했다. "바보 같은 놈아, 이 돈을 다 세려면 하룻밤도 모자라. 기다려 봐. 오늘 저녁 9시 뉴스에서 알려줄 테니까." 지식이나 이론보다는 실질적으로 쌓아온 경험이 낫다는 것을 말해주
국회 예결위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예산을 두고 여야의원이 옥신각신하다가 A의원이 반말을 하자 B의원이 열 받아 소리쳤다. "야, 니 몇년생이야?" 본질은 사라지고 막말에 고성만 오가다가 회의는 종치고 말았다. 싸우다가도 불리하면 "니, 몇 살이고?"를 따진다. 논점과는 아무 상관없는 말로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전술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일탈오류의 한 방법인 '주의전환오류'라 한다. 영어로는 레드헤링(red herring)이다.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온 날짜 계산에 민감하다.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 대화를 잘하고
해방이 되던 1945년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78%였다. 문제는 선거 때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기호 대신 작대기를 사용했다. 투표용지에 작대기를 세어보고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을 찍었다. 거리에서는 '작대기는 하나, 작대기는 하나 홍길동'이런 식으로 선거운동을 했다.인도에서는 아직도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1/4이나 되기 때문에 연꽃·나비 심지어 빗자루·베개·싱크대 등 유권자들에게 친숙한 물건들을 정당의 상징으로 내세워 그 문양을 보고 투표하고 있다.해방 후 열에 여덟은 까막눈이었는데, 한글정책으로 10년만에 열에 여덟은 글자를
'삼시세끼'는 tvN에서 방송중인 예능 프로그램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시골집에 모여 하루 세끼 밥을 직접 해먹는다는 것이 콘셉트다. 뭐 특별한 이벤트도 없이 그냥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인데도 흥미롭다.집에서 한 끼도 밥을 먹지 않는 남편은 무식이, 한 끼만 먹으면 일식이, 두 끼는 두식이, 세끼를 다 챙겨 먹으면 '삼식이 새끼'라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농담속에는 퇴임 후의 남성들의 비애가 담겨져 있다.엊그제 발표를 보면 국민 1인당 하루 쌀 소비량은 155.8g으로 하루 종일 밥 한 공기(200g)도 안 먹는단다. 옛날에는 못살아
비가 오는 날이면 파전에 막걸리가 생각난다. 한 여름이라도 삼겹살 지글지글 굽으면 소주가 생각나고, 치킨이 있으면 맥주가 생각난다. 술은 맛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우리의 술 문화는 어떤 정서적 분위기일까? 당나라 시인으로 달과 술을 사랑했던 이백(李白)을 빼놓을 수 없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동요에 나오는 사람으로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그가 우리나라의 사대부나 시인묵객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혼자 술을 마신다 /잔 들어 달을 부르니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네'라
조선중기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술을 좋아했다. 어느 날 잔치 집에 갔다가 그날도 술에 흠뻑 취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탔는데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이를 본 하인이 "나으리, 신발을 짝짝이로 신으셨습니다요" 하고 말을 하자 임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 이놈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길 왼편에서 보면 나막신을 신었구나 할 테고, 오른편에서 보면 가죽신을 신었구나 하겠지. 괘념치 말고 어서 집에나 가자."이 이야기는 조선후기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 제7권 낭환집서( 丸集序)에 실려 있다. 낭환은 쇠똥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