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부속섬은 10개의 유인도와 63개의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구조라리 서쪽, 양지마을 남쪽 500m 해상에 위치한 윤돌섬은 63개의 무인도 중 애써 배를 타고 찾아가지 않아도 자주 만나게 되는 섬이다.구조라해수욕장을 지나거나 황제의 길로 드라이브를 하다보면 꼭 만나게 되는 윤돌섬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239호로 등록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섬이다.뿔고동을 얹어놓은 모습을 한 윤돌섬 남동쪽에는 작은 동굴이 있으며, 면적 1만1207㎡(3390평) 대부분(70∼80%)이 상록활엽수로 덮여 사시사철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경상남도
경남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 신계마을 들판 이팝나무 아래에는 각각 '가선대부삼도통제사조공경애휼역졸비(嘉善大夫三道統制使趙公儆愛恤驛卒碑)'라는 글자와 통제사조공경선정비매치처(通制使趙公儆善政碑埋置處)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제107대 통제사를 지낸 조경과 제142대 통제사 조심태다. 1739년(영조 15년) 통제사로 부임한 조경은 당시 둔덕면 한산도에 제승당을 중수하고 이순신 유허비(遺墟碑)를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1592년 7월7일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친 이순신은 1593년 8월1일 삼도수군통
경남 거제시 가라산 정상(585m)에 위치한 가라산봉수대는 조선시대 한양의 목멱산봉수(서울 남산)에 신호를 전달하는 경상도의 직봉 2로중 간봉 2로의 초기(初起) 봉수로 조선 초기에는 미륵산 봉수(통영)로에 신호를 전달했다.가라산봉수대는 경상도지리지(1425년) 거제현 편에 기록된 것으로 미뤄 이보다 이른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가라산봉수는 조선 중기 계룡산 봉수가 신설되면서 계룡산봉수를 거쳐 미륵산봉수로 전달했다. 거제의 치소가 거제면으로 옮겨지고 계룡산봉수가 폐지되면서 신설된 한산도 한배곶봉수(통영)에 신호를 전달
2002년에 편찬된 거제시지에는 강망산봉수대를 인근에 가을곶(柯乙串) 봉수대로 추정하고 있다.거제시지의 편찬 과정에서 대동여지도를 해석한 결과 옥포항(玉浦港) 북단에 조라포가 있고 그 위에 율포·장목포의 순으로 표기돼 있다. 이는 위치로 볼 때 율포의 가을곶 봉수대가 강망산봉수대와 가장 인접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에서 해석한 결과다.그러나 가을곶(柯乙串)은 현재 해금강의 고유지명인데다 대동지지에도 동부면 율포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 등을 미뤄 현재 강망산봉수대로 보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거제 강망산봉수대는 경상남도 거제시 덕포동
옥녀봉봉수대는 거제지역 남동쪽에서 침입하는 왜구를 감시하기 위한 최적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단으로 석축을 쌓은 형태의 옥녀봉봉수대는 북쪽으로 강망산 봉수대와 연결되고, 동쪽으로 장승포 일대, 서쪽으로 아주·옥포, 남쪽으로 일운면 와현을 한눈에 볼 수 있다.거제시 장승포동의 옥녀봉에서 동쪽 해발 222.6m 지점에 위치한 옥녀봉봉수대는 지난 1994년 후반부터 복원을 위한 측량조사를 실시해 이듬해인 1995년 동아대가 보고서를 발간했다.'대동지지'에 따르면 거제도에는 가라산 봉수·가배량에 남망 봉수·옥포에 옥림산·지세포에
지난 2002년 8월14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43호로 지정된 와현봉수대는 일운면 지세포리 망산 정상 약 300m에 자리잡고 있다.사방의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만들어진 와현봉수대는 거제지역에 만들어진 봉수대 중 일본의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봉수대이기도 하다.와현봉수대 동쪽에는 한국석유공사 거제지소가 위치하고, 서쪽에는 와현해수욕장·남쪽은 서이말등대·북쪽 인근에는 지세포가 있다.와현봉수대는 전국 120여개의 연변봉수중 하나로 강망산봉수대·옥녀봉봉수대 북쪽·지세포봉수대에서 내려오는 신호를 받아 가라산봉수대
매년 1월1일 일운면 주민들이 해돋이 행사를 하는 지세포리 새피재(또는 샛풍이재) 정상에는 봉수대 흔적이 있다. 원형의 방호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인 이 봉수대는 2002년 8월14일 경상남도기념물 제242호로 지정된 거제 지세포봉수대(巨濟 知世浦烽燧臺)다. 봉수대는 지름이 약 25m를 넘어 내부가 꽤 넓은 편에 속하며 축대벽이 꽤 높고 잘 보존된 편으로 알려졌다.지세포봉수대는 봉수대 북쪽의 옥녀봉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남동쪽이 와현봉수로 전달하는 봉수인 권설봉수로 추측된다.권설봉수(勸說烽燧)는 조선 후기 군사적으로 중요한 영(營
국토의 70%가 산지로 이뤄진 우리나라 지형의 특징상 봉화만큼 효율적인 통신수단도 없었다.봉수는 필요에 따라 밤에는 불빛으로, 낮에는 연기로 전달했다. 밤에 피워 올리는 것을 봉(烽·횃불)이라 하고, 낮에 피워 올리는 것을 수(燧·연기)라고 한다.1485년 간행된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기 전국에 650여 개의 봉수대가 있었고, 신호 방법은 횃불의 수로 달리했다.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 출현 시 횃불 2개, 국경 접근(근접) 시 횃불 3개, 국경 돌파(침범) 시에는 4개, 적과 접전 시에는 횃불 5개
'독널(甕棺)'은 항아리나 독을 2~3개를 맞붙여 만든 관(棺)으로, 인류가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로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다. 이에 지역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독널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시체, 즉 주검이나 뼈를 묻은 토기인데 넓은 의미로는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든지 흙으로 빚어 구운 것에 주검을 묻는 것을 일컫지만 대체로 일상용이나 널로 쓰도록 만든 토기에 주검이나 뼈를 묻는 것을 말한다.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청동기시대~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고, 조선시
동회도(同會圖) 또는 계회도(契會圖)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문인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일종의 기록화다.계회도는 정형화된 양식을 보이는데 화면을 3분해 상단에 예서로 계회명을, 중단에 계회 장면을, 하단에는 참석자들의 관직·이름·자(字)·본(本)·관(官)·부(父) 등을 적는다. 계회참가자들의 생존연대, 혹은 실제 계회를 개최한 연도에 간기(干紀)가 있어 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조라포남봉관해도(助羅浦南峰觀海圖)도 조선시대 계회도의 형식에 맞춰 화면 중앙에 계회가 열리는 남봉(지금의 수정봉)을 나타
거제시 장목면사무소에서 장목중학교와 장목교회를 지나면 나오는 오솔길로 가다보면 사찰 하나가 나온다.경남유형문화재 제454호 장흥사 지장보살시왕탱화가 보관된 장흥사다. 거제시지에 따르면 장목면에는 신라시대부터 장흥암이라는 고찰로, 현재 사찰은 조선시대 순종 때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사찰에 보관중인 지장보살시왕탱화(또는 지장보살시왕도) 아래 화기(畵記)에는 의은(義銀)이라는 금어(金魚·불화를 그리는 사람의 호칭)가 1822년 그린 것이라는 기록으로 있어 이 시기 이전부터 장흥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또 장흥사 절터에선
국립 경주박물관에는 소장번호 '경주2853'의 마제석검이 수장고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거제시 동부면 산양마을에서 출토돼 1980년 5월1일 경주박물관에 수장된 이 마제석검은 길이 26.1㎝이다. 또 길이 8㎝ 정도의 화살촉도 발견됐다. 이 마제석검은 두 조각으로 토막이 난 상태로 발견됐지만 전체적인 형태가 잘 남아있고 화살 석촉도 형태가 그대로였다.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마제석검은 지배계층의 상징물로 알려져 있다. 마제석검은 집터를 비롯해 고인돌·돌널무덤·조개더미유적 등에서 나오
거제시 장목면 '장목진 객사' 안내판에는 '이순신 장군과 이영남 장군이 거제 옥포해전과 칠천량해전의 전략을 세웠던 장소'라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장목진 객사가 임진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 내용을 잘못 해석하면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실제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장목지역은 왜군의 주요 집결지 및 주둔지였고 이 지역을 조선군이 점령한 사실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장목진 설치와 관련된 기사는 현종 2년(1661년) 장목 만호 임명 기사(이후 한동안 만호가 아닌 별장이 근무), 숙종 46년(1720년) 이
거제지역 등록 문화재 1호는 지난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7호에 지정된 학동 '진석중 가옥(陳石中 家屋)'이다.등록문화재는 기존 문화재 지정제도를 보완하고 문화재 보호방법을 다양화해 위기에 처한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된다.진석중 가옥은 오랫동안 방치돼 오다 한 대학교수가 휴가차 인근 펜션에 머물다 진석중 가옥을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알리면서부터 등록문화재가 됐다.안채와 별채, 창고, 대문 등 4개 건물 등 약 220평 남짓한 규모의 진석중 가옥은 1940년대 말 경남 남해안 도서지방 상류층의 주거 특징과
지난 1995년 거제시와 동아대박물관팀은 둔덕면 거림리 거제고군현치소지 일원을 발굴하게된다.당시 이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경지정리 작업 중에 기와조각과 건물의 초석(礎石)으로 추정되는 큰 돌이 집중 발견되면서 시작된 발굴조사는 거제지역 역사를 규명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조사로 평가되고 있다.이후 경상남도 기념물 제162호로 지정된 거제고군현치소지의 발굴 결과 논바닥에서 많은 초석과 축대(築臺), 배수시설(排水施設) 등이 발견됐고, 고려시대의 막새, 상사리(裳四里) 명문(銘文) 기와 등 다양한 명문 기와, 신라와 및 고려시대의 토기 조
지난 2016년 거제시 남부면 다대마을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의 거제지역 및 어촌마을의 역사 등 마을의 각종 행사와 역사가 담긴 문서들이 대거 발견됐다.다대마을의 역사이자 살아있는 거제의 역사가 기록된 값진 문화유산으로 평가된 이 기록물에는 거제와 통영을 중심으로 남해안에서 행해졌던 '별신굿'에 대한 다양한 기록이 발견됐다.문서는 갑오개혁기(1894년)부터 대한제국(1902년) 시기 및 1920년대부터 1945년 일제의 강제병합 시기, 1945년부터 1960년대 세 시기의 문서로, 특히 문서중에는 마을 사람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 일대는 큐슈지역에서 배가 건너올 경우 꼭 거쳐서 가는 하는 곳으로 경남 남해안 일대를 그물망처럼 이어주는 꼭짓점의 역할을 수행한 지리적 요충지였다.거제지역은 6세기 가야와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낙동강과 남강 일대의 내륙지역에 비해 주변 정세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고, 때문에 학계에선 무덤의 주인이 가야와 신라의 영향력 없이 고향인 일본 큐슈지역의 특징을 고분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고분이 단독으로 축조된 것은 무덤 주인이 단순교역을 목적으로 한 인물이 아닌 중요한 목적에 따라 왜(倭)가 직접
기원전 1~2세기부터 중국의 동북부-한반도 서부-남해안-일본 규슈지역이 활발히 교류했다는 것은 다양한 유적을 통해 알려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거제지역과 관련된 자료는 많지 않았다.그러나 거제시 아주동 지역 집자리에서 일본 고훈시대(古墳時代·3세기 중반부터 7세기 말까지의 약 400년) 토기인 하지키계 토기가 발견됐고 이어 농소리고분군과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 시기 일본과 거제도의 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됐다.농소리고분 석실 내외부에서 발견된 원통형토기와 철모(철제 창)·삼지창의 경우 의례 흔적으로 보인다.
지난 2004년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가 발굴한 고분 1기에서 거제뿐 아니라 삼한시대 한일 교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 쏟아졌다.대우건설이 시행한 거가대교 접속도로 '거제-부산간 연결도로 민간투자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시굴조사(2001년) 과정에서 발견된 이 고분은 발굴전까지 봉분의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어 시굴 당시까진 별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하지만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고분의 형태도 특별했지만, 무덤 주인을 가늠할 수 없는 부장품은 지금까지 발굴된 어떤 고분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독특한 자료였
문화재의 가치는 많은 사람이 문화재를 보고 느끼며 소중하게 보존하는데 의미가 있다.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내 세워져 있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 아양리 삼층석탑(鵝陽里 三層石塔)의 경우도 거제시민의 눈에 쉽게 담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지역 유산 중 하나다.1935년 아양리 탑골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고 전하는 이 석탑은 발굴 당시 일부를 찾지 못해 하탑신 대신 자연석을 올려 형태를 만들었고 상륜부도 보수해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기단도 몇 개만 남아 있었고 기단과 땅을 덮은 돌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