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로국(瀆盧國)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변한 12국의 하나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경계를 이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변한 지역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소국임을 알 수 있다.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거제의 옛 이름인 '상군(裳郡)'과 '독로국'이 음으로 서로 통하고[독로=두루·도로=상], 독로국 남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독로국이 거제라고 밝혔다. 최남선은 '동경통지'에서 거제를 상군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 '치마'를 뜻하는 속어로 '두룽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두
신석기시대 바다를 건너온 거제사람들은 농경과 목축으로 식량 생산을 늘리면서 이전보다 발달 된 문화와 대규모 공동체로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거제지역의 청동기 유적은 주로 해안가와 하천 주변 들판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거제지역은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 유적만 90개 넘게 발견됐다.거제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바둑판고인돌(남방식·기반식)로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현재 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고인돌은 사등면 청곡리 지석묘와 일운면 지세포리, 둔덕면 학산리 고인돌 등이다. 거제지역의
거제지역에 남아 있는 유적 및 유물을 짐작해 보면 거제도에 사람이 건너와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로 보인다.신석기는 석기시대 마지막 단계로 신석기시대는 인류가 처음으로 원시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을 하게 되는 시기다.신석기는 인류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로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 경제를 벗어나, 농경이나 목축을 기반으로 안정된 정착생활이 시작됐다.또 인류가 토기·간석기를 사용하고 직물 기술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문화특성을 지니게 된 시기도 신석기시대다.지금까지 거제지역에서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물은 없다. 하지만
역사란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의미 있는 과거 사실에 대한 인식. 또는 그 기록을 말한다. 따라서 역사 이전의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한다. 거제의 역사는 삼한시대 독로국에서부터 시작된다. 독로국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왜와 국경을 접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약용은 저서 '아방강역고 1권 변한고'를 통해 독로국을 거제도로 비정했다. 거제도는 6세기 중반 가야 멸망 후 신라에 흡수되며 신라 문무왕 상군이 설치되고 거로현(居老縣), 송변현(松邊縣), 매진이현(買珍伊縣)을 속현으로 둔다(4개의 현이 독로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거제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별 역사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특히 둔덕면 지역은 전국에서도 드물 정도로 한 지역에 치소지(거제고군현치소)·치소성(둔덕기성)·고분군(방하리고분군 등)이 발견되고 있는 곳이다.이중 2019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298호에 지정된 방하리 고분군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거제지역 지방 호족과 신라 문화가 융합돼 만들어진 유적으로 알려졌다.그러나 방하리 고분군의 정밀조사결과 서쪽 고분군부터 동쪽으로 갈수록 후대에 조성된 데다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 증언이 많아 고려시대 봉분은
겨울 바다, 그것도 거제에서만 군락을 이루며 사는 철새가 있다. 물오리를 닮은 잠수의 달인 아비류((阿比類)다.수려한 풍광만큼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거제는 천연기념물 204호 팔색조나 천연기념물 제330호 수달의 개체가 많아 보호종이라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많이 발견된다. 팔색조나 수달은 꼭 거제가 아니어도 볼 수 있는 동물이다. 하지만 아비떼는 거제지역 연안이 아니면 좀처럼 보기 드물다.거제연안의 아비도래지는 1970년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277호에 지정됐으며 현재 아비도래지로 지정된 구역은 남부면 홍포 망산각 무인등대
'두문불출'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 것, 또는 사회의 일이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을 말한다.중국 춘추시대에서 비롯된 사자성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킨 고려 유신(遺臣)들을 가리키는 말로 더 널리 알려졌다.거제지역에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충절을 지킨 인물과 현장이 남아 있는데 고려 멸망 이후 거제에 은둔해 살았고, 사후엔 두문동 서원에 배향된 정은(正隱) 옥사온(玉斯溫)의 이야기다.기록에 따르면 옥사온은 의령 사람으로 충정왕 3년(1351년)에 태어나 태종 13년(1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거제포로수용소는 현재 거제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거제지역은 고현과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포로수용소가 설치된 후 거제지역은 인민군·중공군 포로 등 최대 17만3000명을 수용하며, 피난민과 포로·거제도민까지 50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953년 6월18일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계기로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따라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됐다.이후 1983년 일부 잔존 유적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됐으며 잔
수성용 투척 무기로 알려진 '석환(石丸)'은 화살촉이나 각종 철제 무기와 달리 가까운 자연에서 얻은 가장 오래된 원시적인 무기인 탓에 오래된 군사시설에서 발견된다.거제지역에서는 거제둔덕기성, 거제옥산성, 거제다대산성 등 주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곽 유적 및 지세포 봉수대에서 발견됐다.석환은 크고 둥근 강돌을 성 밖에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거제지역의 석환은 대부분 직경 10~20㎝ 정도와 약 30~50㎝ 정도다.거제둔덕기성과 거제옥산성에서는 석환이 대량으로 발견됐는데 거제둔덕기성의 석환은 성내 북쪽 정상부에서 수천여 개가 발
2018년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 강제 징발문서'가 발견됐다.이 문서는 거제시가 경상남도기록원에 보낼 기록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군 징발관계 서류철-피징발자 피해 조서'라는 문서를 찾으면서 확인됐다.문서는 1955년 10월29일 내무부 차관의 재조사 지침에 따라 읍면별로 공공과 민간소유로 구분해 피징발자들의 성명·주소·피해규모 등을 자세히 조사해 총 2권 583쪽 분량이다.1955년 12월20일 거제군수가 경상남도내무국장에게 보낸 문서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엔군 포로수용소 설치에 따른 피징발자의 피해보상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거제면 동산리 수정봉 정상에는 길이 778.5m·최고높이 4.7m·폭 3m로 만들어진 거제옥산성(경상남도기념물 제10호)이 있다.거제옥산성은 1873년(고종10) 거제부사 송희승(宋熙昇)이 백성을 동원해 관아 뒤편 수정봉에 성을 쌓고 성을 쌓은 내력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 비석이 옥산금성축성기비(玉山金城築城記碑)다.옥산금성축성기에 따르면, 옥산금성은 1873년 3월6일 처음 축성을 계획하고, 3월15일 준비를 시작해, 5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송희승은 1873년 10월15일 옥산금성을 완성하기까지 짧은 시간동안 거제도 전역에서 2만냥
2007년 9월21일 학동 진석중 가옥에 이어 거제지역에 또다른 등록문화재가 지정됐다. 등록문화재 제356호 거제초등학교 본관이다.문화재청에선 석조로 건축된 초등학교 교사의 유례가 적고 한국전쟁 전후 교육기관의 복구와 시련극복, 지역주민의 참여하에 지어진 교사라는 점 등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대한제국 말 쓰러져가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교육보국의(敎育報國) 기지로 세워진 거제초등학교는 107년 동안 거제 근대교육의 요람이다.대한제국 광무(光武) 11년(고종 44년·1907년) 2월10일 당시 고희준 거제군수와 김
임진왜란 이후 1664년 (현종5년) 거제도의 중심지는 고현지역에서 거제면 지역으로 옮겨진다.그러나 관아를 옮긴 이후에도 옛 치소지인 고현지역에는 적잖은 백성들이 거주했고, 거제면과 고현지역의 백성들은 왕래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문제는 당시 고현지역과 거제면 지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고자산치(姑子山峙)가 너무 경사가 심하고 험해 백성들의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이 길은 현재 거제면 명진 뒷산 고개를 넘어 상문동 용산마을에 이르는 길로 선자산 골짜기를 넘기 때문에 고개가 높아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고 고개를 오르기 힘들었고
지난 2016년 국립 김해박물관은 넉달간 거제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지역 유물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제 큰물을 건너다' 특별전을 열었다.특별전은 거제지역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과 고문헌 등 모두 7가지 주제로 전시가 진행됐다.이때 전시된 유물들은 거제에서 발견됐지만 전시공간이나 보존공간이 부족해 다른 지역 박물관이나 대학교 소장고에서 보관돼 오던 거제지역 관련 유물들이었다.거제에서 볼 수 없는 지역유물인 만큼 거제지역민들에게 적잖은 관심을 받은 유물이 많았다. 이중 거제부도(巨濟府圖) 8폭 병풍의 경우 거제시가 반드시 소장해야
거제도의 시화는 동백(冬柏)이다.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초겨울에 꽃 피우는 겨울꽃나무로 잘 알려져 있는 동백나무는 늘 푸른 잎을 달고 있으며 다른 나무들은 활동을 멈추고 겨울잠 준비에 여념이 없는 늦가을부터 조금씩 꽃봉오리를 만들어 간다.특히 동백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하나둘 꽃을 피우기 시작해 봄의 끝자락에 이를 때까지 꽃을 피우며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랑', '겸손한 마음' 등의 꽃말을 갖고 있다.동백은 오랫동안 거제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은 나무로 거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거제지역에서 이름난
'수중묘' 하면 삼한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의 묘인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巖)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거제에도 사연이 담긴 수중묘가 있다.거제면 오수리 941번지(죽림마을) 선착장 끝 바닷가 '여치끝'에 만들어진 이 수중묘의 주인공은 1863년에 태어나 1948년에 생을 마감한 '배귀임 할머니'다.늘 물에 잠겨있는 대왕암과 달리 할머니의 수중묘는 누구나 물때(조석예보)만 맞추면 쉽게 갈 수 있는 '수중묘'다.문무왕이 신라의 안녕과 번영을 걱정했다면 할머니는 죽어서도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한 막내아들을 걱정했다는 전설이 전
거제에 사람이 처음 살았던 흔적은 신석기시대부터다. 바다를 건너온 거제의 조상들은 농경과 목축으로 식량생산을 늘리면서 문화를 발전시켰고 대규모 공동체를 만드는 등 청동기문화를 만들어갔다.거제지역의 청동기 유적은 주로 해안가와 하천 인근 들판에 위치하고 있어 당시부터 거제지역은 수량이 풍부한 골짜기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거제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고인돌은 사등면 청곡리 지석묘와 일운면 지세포리·소동, 연초면 다공, 둔덕면 학산과 술역에 있는 고인돌이다. 청곡·지세포·학산 지석묘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비교
조선은 나라를 세우면서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유교의 예법에 따르면 국가의 도읍지에는 반드시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데, 세 곳이란 왕이 머무는 궁궐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그리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말한다.종묘는 수도에만 설치하는데 반해 사직은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에도 세워졌다. 사직은 나라에서 백성의 복을 빌기 위해 토지신 사(社)와 곡식신 직(稷)을 모신 단으로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
고성만큼은 아니지만 거제지역에도 공룡이 살았던 흔적은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다.일운면 외도의 동섬, 남부면 신선대 일대 해변, 장목면 관포·두모·송진포 해변, 하청면 석포리 남쪽바닷가, 사등면 청곡리 바닷가 등이다.외도공룡발자국 화석은 일운면 외도 동섬 끝 부분의 중생대 백악기 지층에서 확인된다. 외도 동섬 낚시터에 23개, 남쪽 돌섬에 117개의 공룡발자국화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악기 외도 인근에는 많은 육식공룡과 초식공룡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남부면 갈곶리 솔섬 맞은편 해안에는 새발자국 화석과 익룡 발자국 화석이 확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664호 거제현 관아 송덕비군(거제면 동상리 415-2)은 기성관 좌측에 일렬로 세워진 비석군으로 철비 6기와 석비 8기 등 모두 14기다.송덕비군은 애초 거제향교 입구와 거제면 동상리·서정리에 세워져 있었던 송덕비들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기성관 해체 복원작업이 진행될 때 기성관으로 옮기면서 조성됐다.이 비석들은 1664년(현종 5년) 이후 약 250년 동안 부사·암행어사·통상국·순상국·관찰사 등 거제를 위해 선정한 이들을 기리는 송덕비로 조선시대 후기 거제역사를 반영하는 기념물로 문화재적 가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