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미꾸라지가 많았다. 집 앞에 작은 도랑이 있었는데 거기서 미꾸라지를 잡아 검정고무신에 담아 놀았던 기억이 난다. 여름에 비가 오면 마당에 미꾸라지가 꿈틀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다.어른들은 미꾸라지가 비를 타고 하늘로 오르려다 떨어졌다고 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가을추수를 앞두고 물을 빼고 논을 말리기 위해 논가를 삥 둘러 도랑을
어렸을 때 어머니는 농사에는 마이다스 손이었다. 냇가 방천에 호박을 심으면 들고 가기가 버거울 정도로 커서 아버지께서 바지게로 지고 날랐다.그런데 내 기억에 호박을 수확하면 그 중 제일 크고 잘 생긴 놈을 골라 날더러 담임선생님 갖다 드리라고 하면서 제쳐 놓으셨다.무면 무, 배추면 배추를 한 다발 선생님 몫으로 챙겨 두셨다.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6년을 다니
1959년 추석 전날 밤에 불어 닥친 태풍 '사라'호는 거제도를 초토화시켜 버렸다.최대풍속 55m/s라는 한반도 기상관측 상 최강의 세력이 부산을 중심으로 통과하면서 태풍의 오른쪽인 거제도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인명사고도 많아 추석 무렵에 제사를 지내는 가정은 그때에 희생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그러나 거제도와 멀리 떨어진 육지 사람들은 태풍 사라호가 그
대마도에 갔다. 그 곳에서 한말 꼬장꼬장한 유학자이며 애국지사였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의 흔적을 느껴보고 싶었다.그는 어떤 사람인가? 서른다섯의 나이에 정4품 관직인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된다.이 직책은 문과 급제자 중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고 청렴강직하며 무엇보다 청빈함을 요구하는 청요직(淸要職)이다.장령이 되자 맨 먼저
대마도(쓰시마)에 갈 기회가 생겼다.부산에서 하타카츠항까지 불과 1시간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대마도에서 본토인 규슈(九州)까지는 147km 떨어져 있지만, 부산은 그의 약 1/3정도밖에 되지 않는 49.5km에 불과하다. 날씨가 맑은 밤이면 대마도 와니우라 산언덕 위에 있는 한국전망대에서 부산 광안대교의 불빛을 훤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지척의 거리
임금이 나라에 난을 당해 피난길에 오르셨다가 동해바닷가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민가에서 하룻밤 주무시게 됐다.가난한 어부는 밥 한 그릇과 생선을 올린 조촐한 저녁상을 차렸다.임금은 시장하던 터라 꿀맛 같은 식사를 끝내고 "내가 먹어본 생선 중에 이렇게 맛있는 것은 처음 봤다. 이 고기 이름이 무엇인고?"하고 어부에게 물었다. "묵이
그리스 신화에 한 여신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올림포스 산에서 쫓겨났다. 여신은 수치스러워 끝내 자결했고 그 무덤에 꽃으로 피어난다.사람들이 자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씨주머니를 퍼뜨렸다. 죽어서도 자기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의 속을 다 들어 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봉숭아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또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마세요
한여름 땡볕을 받고 화단에 봉숭아가 피었다. 전에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그런데 봉숭아만큼 많은 이름을 가진 식물도 드물다.조선시대 책에서는 '봉선화(鳳仙花)'로 적혀 있지만 지금의 우리 표준어는 '봉숭아'다. 조선 순조 때 문인이던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색씨와 아이들이 봉사꽃을 백반에 이겨 손톱에 물들이다'는
올해부터 폭염특보제가 도입되었는데 경남에는 7월 초에 벌써 폭염주의보가 곳곳에 발령되었다.최고기온 33℃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이 예상되면 폭염주의보를, 35℃ 이상이면 경보를 내리게 된다.'오뉴월 더위에는 암소뿔이 물러 빠진다'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자동기록식온도계가 발명된 이후 최고의 더위는 1922년 9월 13일 멕시코에서 무려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척 더운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이라도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고, 여름이면 체온과 비슷한 평균 35도를 훌쩍 넘는데다 심할 때는 45도에 이른다. 자동차 보닛 위에 계란을 깨어 놓으면 프라이가 될 정도다.이곳에 석유난로를 팔아 중동시장의 80%를 석권한 우리나라 '파세코'라는 중소기업이 있다.낮에는 혹서지만 사막과 산지가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마누라'라는 말의 발생지는 경상도라고 한다. 결혼한 신혼 첫날밤 신랑이 부끄러워하는 신부에게 하는 말 "마! 누∼라"그런데 이 마누라라는 용어를 젊은 여자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얕잡아보는 듯한 느낌이 있고, 특히 '영감'이 짝이 되기 때문에 늙은 티내는 듯해서 더욱 그러하다. 사전에도
1880년대 미국 서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금을 찾아 몰려드는 '골드러시'를 이루었다. 한 청년이 모든 재산을 투자해서 광산을 하나 샀다. 그런데 아무리 땅을 파헤쳐도 금은 나오지 않았다.그는 포기하고 금광을 팔아 버렸다. 그런데 새 주인은 불과 1m를 더 팠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노다지가 있었다. 이를 '1m의 법칙'이라 한다.물이 100°에
삼국시대 강동 손권의 수하였던 정천(鄭泉)은 어찌나 술을 좋아했던지 그가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부디 내 시체를 질그릇 만드는 가마 곁에 묻어주게. 백년 후에 백골이 삭아서 흙이 되면 누가 아는가, 그 흙을 파다가 술병을 만들지'라고 했다. 이런 고사에서 나온 말이 '사위주호(死爲酒壺)'다.우리나라에 소주가 언제 들어왔는지 확실한 기록이
아리랑은 지방마다 거의 있지만 전라도 '진도아리랑' 경상도 '밀양아리랑' 강원도 '정선아리랑'이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이다.그러나 지역 이름 없이 그냥 아리랑이라 했을 때는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곡이었던 '경기아리랑'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가장 알려져 있다.아리랑의 형식은 사설(메김소리)과 후렴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설은 언제든지
김유정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들병이'다.술병을 들고 들에 다니면서 농사짓는 남정네들에게 술을 팔면서 동시에 간혹은 섹스 파트너가 되어주는 여인으로, 주로 노총각이나 머슴들이 즐겨 찾던 이동식 술집이라고 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용어로 본디말은 '들병장수'다.근래에 공원에 쉬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박카스를 건네며 접근해
여러 가지 색깔이 두루두루 어울리게 잘 갖추어진 상태를 이를 때 '구색(具色)이 맞다'고 말한다.우리의 전통적인 미인도 '구색(九色)'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를테면, 손과 살결과 치아는 희야 하고(三白),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눈썹은 검어야 하고(三黑), 손톱과 볼과 입술은 붉어야(三紅)한다.피부를 희게 하기 위해 분(粉)을 사용했다. 분은 쌀(米)과
초등학교 교실, 과학수업에 쓸 실험용 쥐가 도망을 치자 선생님과 아이들이 쥐를 찾기 위해 수색을 벌였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쥐 잡는 것을 포기하고 수업이 시작되자 교실은 조용해졌다.그 때 한 소년이 교실 뒤편 벽장을 가리키며 쥐가 거기에 있다고 일러주었다.정말 거기에는 교실을 소란케 했던 쥐가 숨어 있었다.이 소년은 출생 후 인큐베이터 안에서 산소
스님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던 시대에는 이런 계율이 없었다.당시의 수행자들은 식생활 해결을 걸식(乞食)에 의존했다. 음식을 탁발해야 하는 처지에 보시하는 이의 공덕에 따라 주면 주는 대로 공양할 뿐이었다.채식이든 육식이든 받는 이의 선택이 아니라 주는 이의 뜻에 달려 있
'행주치마'라는 어원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대첩 때 처음 생긴 말이라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60년 전에 쓴 최세진의 사성통해(四聲通解)에 행주치마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행주(抹布)치마와 행주(幸州)산성의 행주가 음이 같아 생긴 오류일 것이다.아줌마의 트레이드마크인 '월남치마'는 월남전에 참가했던 우리 군인들이 가져와 유
중국 역사에 웃음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한 여인이 있다.포사라는 절세의 미인으로 주(周)나라 마지막 임금 유왕(幽王)의 후궁이었다. 문제는 포사가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은 포사를 웃게 하려고 악공을 불러 가무를 연주케 해도 허사였고, 포사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삼아도 웃지 않았다.다만 비단을 찢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말에 매일 비단 수십 필을 찢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