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식구가 허둥댄다. 늦잠을 잤기 때문이다. 지나쳐버린 시간을 두고 잠시 멍하니 앉았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두서가 없어서이다.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오류가 난 것일까. 분명 알람시간을 맞춰놓고 재확인까지 해두었는데. 머리맡에 둔 자명종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은데. 엉망이다. 여러 발자국소리가 섞여 산란하기만 한다. 세수도 하는 둥
식구가 늘었다. 갑자기 집안이 부산하다. 우리 부부와 ‘소동’이 이렇게 셋이 살던 집인데, 지난주에 ‘소동’이가 새끼를 여덟이나 낳았다. 우리 집에 올 때만 해도 별로 배가 부르지 않았었다. 원주인이 몸에 새끼를 가졌다고 들려주었지만, 그리 흔적은 없었다. 몇 주가 지나면서 완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유두가 눈에 띠게 커지고 배도 많이 불러왔
겨우 숨을 돌린다.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온 몸이 젖도록 이리저리 뛰다보면 어느 새 저녁이다. 침이 마른다. 입에서는 단내마저 난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다. 무슨 일을 먼저 하고 빨리 마무리 지을 것인가 생각해본다. 가족에게 있어선 난 주연(主演)이다. 그러나 강력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화려함이 없다. 남편도 아이들도 무슨 일이든 내게 미룬
고속도로를 달린다. 시끄럽던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뒤돌아보니 어느새 잠들어 있다. 남편은 이때다 싶어 속도를 더 낸다. 차창 밖으로 풍경들이 휙휙 달아난다. 마을 어귀에 우뚝 솟은 나무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시야에서 멀어져 있다. 고속도를 달리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는 일이 다반사다. 자동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나의 시선
중환자실 앞이다. ‘절대 정숙’이란 글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소독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입구에 걸려 있는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긴장된 가슴을 누르며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로 시야가 흐릿하다. 늘어선 하얀 침대들이 가슴을 압박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환자들만 누워 있다. 아버지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숨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보내고 나서 문득, “요즘도 관제엽서가 나옵니까?” “그럼요, 이백 이십 원입니다.”몇 십 원 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기만 하다. 관제(官製)라는 말이 좋게 들릴 일 별로 없지만 엽서는 느낌이 달랐다. 나도 어딘가에 뽑힐 것 같은 희망 때문인지 반가운 노래에 가슴 뛰는 사연이라도 기대했기 때문일까. 어쩐지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 관제엽서가 예
우리 집에 간간이 민박 손님이 찾아든다. 가족과 함께 올 때도 있고, 연인끼리 오기도 한다. 가족들이 숙박할 때와 연인들이 숙박할 때의 부엌 풍경이 다르다. 가족들이 왔을 때는 대부분 여자들이 부엌엘 들락거린다. 그런데 연인들끼리 왔을 때는 남자가 식사를 준비 하려고 부엌엘 드나든다.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 같으면 어른
흔한 반지 하나 끼지 않는다. 언제나 간편한 복장에 운동화 차림. 등에는 배낭을 진다. 만나는 사람마다 산에 가냐 묻는다. 물론 아니다. 평상적인 차림새다. 그러기를 즐기고 편해서 흡족하다. 상가나 결혼식에 가는 게 아니라면 무얼 하러 가든 누굴 만나든 게이지 않는다.나이를 먹긴 했지만 솔직히 아직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가꾸고 꾸미고 치장을 한다면 한결
온 세상이 연초록인 요즘은 괜스레 기분이 좋다. 화려하고 예뿐 꽃들도 좋겠지만 난 꽃보다는 참한 소녀 같은 연한 잎들이 훨씬 좋다. 창을 열면 싱그러운 바람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오늘은 또 무엇으로 하루를 채워갈까? 생각하다 즐거워진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영화를 봐야겠다. 오월 오일이 어린이 날이었지만 내 병상생활로 인해 일요일에 서로 맞추어보
전래동화에 ‘노인을 버리는 지게’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서 감상문을 쓰게 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부모를 버린다는 대목에서만큼은 야무지게 한마디씩 한다. “어떻게 자기 부모를 버려요?” 야단법석인 이슈가 되고 있는 현대판 고려장이야기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신문과 각종 매스컴에서 들려주는 세상이야기가 정겨운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 보름 병원에 누워 지냈다. 사고가 났을 때는 별로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건 아니지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왜 그렇게 될까 하고 생각해도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상황이었다. 사고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후 일의 처리로 몸과 마음이 많이 다쳤다. 보험회사의 안일한 일처리도 참을 수 없었고, 하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
구속이 없는 절대 자유로운 경지에 노니는 것을 ‘소유요’라고 한다. 장자(莊子)는 이욕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비웃으며 도의 세계, 초월적인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 때 사람은 비로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 북녘 바다에 붕(鵬)이라는 새가 살고 있다. 붕의 등 넓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꽃골이라는 동네를 찾았다. 그곳에 천연염색을 하는 곳이 있다는 얘길 듣고 무작정 찾아 나선 거였다. 잘 몰라 주위를 몇 바퀴 돌다 입구에 다다르니 풍경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역시 천연의 재료들이 널려있어서였을까. 자연의 풍경들이 정겹게 와 닿았다.염색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이미지가 정말 소박하고 순수해 보였다. 아니 정갈했다. 그녀는 나를
모두들 잊고 싶은 기억들이 많았는지 ‘잊혀진 계절’이라며 시월의 마지막 밤인 그 날을 노래하던 그때,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스물한 살의 너를 전송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집결지인 춘천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너는 부모의 동행이 되레 부담스러웠던 듯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춘천까지 동행해준 의리 깊은 네 친구들이
낯선 전화를 받았다. 일상적인 목소리로 방문시간을 통보한다. 택배아저씨다. 내게 무엇인가 오는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부푼다. 받는 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커다란 꽃다발이 나를 반긴다. 장미꽃이다. 언뜻 보아도 꽃송이가 예사로운 숫자가 아니다. 백송이다. 이렇게 많은 장미를 받아보긴 처음이다. 누가 보냈냐고 물으니 말이 없
“갱년기네요.”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뱉어낸 의사의 말이다. 심리적인 안정이 급선무라고 서운함을 접고 가족들 도움을 받으라 한다. 측은한 듯 연민의 눈길로 한참을 바라본다. 이게 어디 섭섭할 일인가. 축하할 일이다. 이제 생리도 끝이 나고 여성으로서 역할도 다한 셈이다. 한 남자와 인연을 맺고 어미가 되었다. 아이들도 탈 없이 장성하였으니 무사히 내 몫을 한
치렁치렁하다. 길게 늘어뜨린 털이 뒤엉켜 빗으로는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할 것 같다. 게다가 얼룩이 져 원래 무슨 색깔이었는지 가늠이 어려울 정도다. 무얼 먹었는지 입가가 젖어있다. 허기를 면하려 구정물이라도 마신 걸까. 가던 걸음을 멈추고 녀석이 물끄러미 날 쳐다본다. 그 눈빛 또한 젖어 있다. 사나운 데라곤 없어 보이는 순한 눈빛에 나 스스로 경계를 푼다
그의 이름은 만득이다. 아니 내가 지은 이름이다. 한 번도 불러 보거나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나 혼자서 지칭하는 이름이다. 오늘이 그가 우리 집 짓는 일에 끼어든 지 석 달로 접어드는 날이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눈인사 한번 한 적이 없다. 언제나 처음 본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무표정하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말을 걸거나 해야 할 말은 없다.
친구가 하는 퀼트 숍에 갔다. 숍 안에는 인형, 가방, 옷, 벽걸이, 이불들이 뽐내며 옹기종기 서 있다. 서로 먼저 선택받기를 원하며 다투고 있는 것 같다.하나하나의 작품은 친구의 피와 땀이 어린 것들이다. 조각조각을 이으며 긴긴밤을 지새우며 작업을 했다. 어깨도 아프고 다리는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렸다. 그런 고통을 참아낸 결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그동안 MSN 대화를 가끔 저장해 두었다. 저장만 했을 뿐 잊고 살았다. 며칠 전 처음으로 파일 몇 개를 열어봤다. 아들이 군 입대를 한 이야기, 관계가 서먹해진 옛 친구랑 다시 잘해보고 싶으니 중간에서 말을 잘해 달라던 친구 이야기, 노트북 사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 것, 떨어져 사는 딸과 나눈 이야기, 수필을 쓰면서 글이 막혀 이런저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