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은 원래 견내량 해전으로 불렸다. 1592년 8월13일(음력 7월7일) 조선 수군 연합 함대가 당포에 머무르고 있을 때, 거제 목동 김천손이 "일본 군선 70여 척이 낮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고 알렸다. 다음날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 쪽으로 출발해 왜군의 척후선을 만난 후 이들을 추격해 본대와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견내량 해역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같이 대형 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긴
이순신의 1차 출정은 3박4일 동안 거제도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서 3곳의 전투에서 승리한 해전이었다. 거제지역 향토사에는 옥포해전에서 30척 중 26척의 전선을 잃은 왜군은 옥포진성에서 전열을 재정비해 옥포해전 이틀 후인 5월 9일 거제현의 중심인 고현성을 침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거제의 조라, 지세, 율포 영등포 등은 이미 왜군이 점령했고 거제현령 김준민이 홀로 고현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옥포해전이 벌어진 시기에 김준민은 제승방략 전술에 따라 초유사 김성일(金
1592년 4월 왜의 선봉대는 부산포를 시작으로 조선의 방어선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북진을 계속했다. 전쟁 시작 2개월여만에 선조와 세자(광해군)는 한성을 버리고 평양까지 쫓겨 간다. 당시 판옥선 4척(협선 2척)으로 겨우 거제 바다를 지키고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율포 권관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지 20일 뒤인 5월4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판옥선(板屋船) 24척과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이끌고 거제를 지원하기 위해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를 떠난다. 여수를
중종 5년(1510) 4월4일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과 대마도 왜구가 전선 1000척을 이끌고 거제 영등포(永登浦)를 에워싸 공격하면서 삼포왜란이 시작됐다.당시 영등포 군사들과 민중들은 수적인 열세를 딛고 방어하자 왜구들은 군사의 반을 근처 주물도(主勿島·이수도)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반은 웅천 제포와 동래 등으로 보내 약탈했다. 4월5일 왜구 무리가 큰 배 5척을 타고 하청리(河淸里)에 정박하자 거제 현령(巨濟縣令) 오세한(吳世翰)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구을 공격했고 왜구들은 곧바로 배 4척에 나눠 타고 바다로 도망갔다. 하지만 얼마
조선의 수군진은 군선의 정박처·병력의 입역처·해양감시 초소 등 다양한 역할을 하는 수군 근거지였으며 건국 초기까지 조선의 수군진은 군선이 머무르는 장소로 지정된 해안지역을 정해 유사시 수군이 집결하는 장소로 사용됐다.전략적 요충지에 진을 둔 이유는 기동성이 떨어지는 전근대 수군이 특성상 적의 침입 가능성이 큰 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만 해도 해양 방어에 적합한 요충지를 선정해 전국 연해 지역에 수군진을 설치했으나 목책만 설치하고 석성을 쌓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선을 타고
태종 3년(1403)에 웅천의 내이포(乃而浦=薺浦)에 처음 설치된 경상우도수영(慶尙右道水營)은 세종 7년(1425) 폐지 후 거제의 남쪽인 탑포(塔浦)와 오아포에 차례로 옮겨왔다. 1430년 3월 산달포(山達浦) 절도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이 시기 경상우수영은 한곳에 정착했다기보다 군선의 정박에 따라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지리지가 만들어질 당시(1454) 경상우수영이 관리하는 수군진 8곳 중 거제지역의 수군진은 경상우수영인 오아포와 영등포 2곳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조 5년 경국대전을 만들 시기 거제의 수군진은 오아포
세종 1년(1419) 대마도정벌 이후 조선이 당시 왜구의 본거지였던 대마도와의 교역을 중단하자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된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사신을 보내 다시 통교할 것을 계속 요청한다.그 결과 세종 8년(1426) 조선은 내이포·부산포·염포 등 삼포(三浦)를 열어 교역을 허가한다. 삼포의 개항 이후 왜인이 늘어나자 조선은 세종 25년(1443) 대마도와 조선 간 세견선(歲遣船)에 관한 조약인 계해약조을 맺어 대마도의 무역선은 50척으로, 조선에서 주는 곡물은 200석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계해약조 이후 대마도 등 왜인들의 교역 요구
거제는 우리나라에서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경상도 및 전라도 지역에 침입한 왜구가 반드시 거쳐 가는 길목이었다. 거제 이외의 지역에 침입한 왜구 대부분도 거제를 거쳐 갔다. 대마도정벌은 조선 개국 3년 전인 고려 공양왕 1년(1389) 2월 박위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해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고려 백성 100여명을 찾아온 것이 처음이다.이후 조선 건국 직후 태조 5년(1396)에도 우정승 김사형을 보내 대마도를 정벌하게 된다. 이때 조선 태조는 김사형에게 보내는 교서에 대마도정벌의 이유를 '국내외 백성을
공도정책(空島政策)은 섬 거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외부세력으로부터 섬을 보호할 힘이 없을 때 섬을 비워 변방 주민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고려말 공도정책과 거제도민의 거창·진주지역 이주는 거제의 역사를 설명하는 각종 문헌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때 거제의 역사는 섬이 아닌 이주 지역이었던 거창에서의 역사였으며 기록도 많지 않다. 거제도에 다시 거제현이 설치되고 백성이 거주하게 된 시기는 세종 4년(1422)으로 거제현은 섬으로 복귀한 이후 여러 차례 치소를 이동한다.이는 세종 즉위년(1418) 조선이 마지막 대
고려가 거제현 사람들을 육지인 진주·거창 등지로 이주시킨 후 삼별초가 토벌됐음에도 곧바로 거제로 돌아오지 못하고 151년 동안 육지에서 더부살이를 한 것은 고려말 극심해진 왜구의 노략질 때문이었다. 고려말 왜구들의 창궐로 거제를 비롯한 남해안 여러 고을은 왜구의 소굴이 됐다. 심지어 공민왕 때에는 왜인 중 원하는 자를 거제에 거주하게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하지만 고려말 거제를 본관으로 하는 반씨가 사족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점은 공도정책 이후 거제현이 육지로 옮겨 갔음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거제에 남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씨는
1271년 거제현 관청과 관리관노 등 일부 백성들이 육지인 진주·거창 등지로 피난 가서 살다가 1422년 환도(還島)한 역사가 있다. 거제는 변방에 위치해 도적과 왜구의 약탈이 빈번했다. "명진현(溟珍縣)·송변현(松邊縣)·아주현(鵝洲縣)의 해적 좌성(佐成) 등 820명이 투항해 왔다"는 인종 6년 10월 고려사 기록은 일찍부터 거제가 해적의 근거지였음을 보여준다. 해적들이 거제를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 중심부에 위치하고 일본 등과 가까워 해상활동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삼별초는
팔만대장경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각각 지정됐다. 대장경은 거제도와 남해안 일대에서 벌목한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중 거제지역의 산벚나무류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지난 2007년 장경판전에 봉안된 경판을 대상으로 무작위 추출해서 일부를 표본 조사한 결과 수종은 산벚나무(64%)돌배나무(15%)거제수나무(9%)층층나무(6%)고로쇠나무(3%)후박나무(2%)사시나무(1%) 등으로 조사됐다.팔만대장경은 거제 등 남해안 지역에 분사도감을 설치하고 3년간 바닷물에 넣어 뒀다가 소금물에
고려는 북으로는 거란 및 몽고의 침략을, 남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고려시대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부터로 충정왕, 공민왕에 이르는 시기에 침입이 잦아졌고 우왕 시기에 가장 빈번했는데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았다.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웠던 거제지역도 왜구 침입에 시달렸는데 고려사에는 거제현령 진용갑(1226)이 왜구를 무찌른 기록이 나온다."봄 정월(正月),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 주군(沿海州郡)에 침구(侵寇)하므로 거제현령(巨濟縣令) 진용갑(陳龍甲)이 수군을 이
거제 유배의 역사는 1112년 7월 고려시대 왕위 계승권 다툼에서 밀린 왕족들이 거제도로 귀양 오면서 시작된다. 거제도 유배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합쳐 500여명으로 추정되며 식솔과 노비 등을 포함하면 1000여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거제에 유배 온 대표적 인물은 고려시대 정과정곡의 정서와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과 이행·최숙생·정황·김진규·김창집·이유원 등이 있다. 정과정곡은 동래에서 지었다는 설과 거제에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거제출신 고전문학 전문가 고영화씨는 정과정곡이 거제에서 지어졌다고 주장했다. 정서는 고려 의종 5년(
고려 의종(毅宗) 24년(1170) 발생한 무신정변은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힐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고려는 100년 가까이 무신들의 집권이라는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자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고려시대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눴고, 이러한 견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로 유폐했다. 당시 의종이 머문 곳이 둔덕기성인지 혹은 거림리에 있었던 거제현 관아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 기록 등에는 둔덕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의종은 둔덕에
고려 성종 14년(995)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에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 평거역(平居驛)~사주(사천)의 관율역(灌栗驛)~고성의 배둔역(背屯驛)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 마지막 역이 거제의 오양역(烏壤驛)이었다.오양역은 원나라 간섭기 이후 삼별초와 왜구의 활동으로 섬을 비우고 주민을 이주시
거제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흔적은 거제고군현치소지, 둔덕기성, 옥산성, 오량석조여래좌상, 하청북사 등이 있다.이중 오량석조여래좌상과 부곡북사종(部曲北寺鐘·일명 하청북사동종)은 융성했던 고려시대 불교문화가 거제지역까지 뿌리 내렸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곡북사종은 현재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좌하현 혜일(惠日寺)에 일본 중요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일본 좌가현(佐賀縣) 당진시(唐津市) 대자종정(大字鐘町) 또는 동송포군(東松浦郡) 경정(鏡町)에 있는 이 종은 고려 현종(顯宗) 17년(1026)에 만들어져 고종 19
고려시대(918~1392) 역사 기록에서 거제에 대한 기록은 현종 9년(1018)에 고성현을 거제에 편입했다는 기사가 최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성을 거제에 소속해 자고현(自固縣)으로 부르고 현령을 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거제는 이미 성종(成宗) 2년(983)에 처음 12목(牧)을 설치했을 때 진주(晋州)에 속해 있었고 이때부터 35년 동안 잠시 기성현(岐城縣)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거제현 관풍안에는 거제의 옛 이름 중 상군(裳郡)·기성(岐城)이 있다고 기록돼 이 시기 거제
삼국사기에 "거제군(巨濟郡)은 문무왕(文武王)이 처음 상군(裳郡)을 둔 곳으로, 바다 가운데 섬이다. 이후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領縣)이 셋이다. 아주현(鵝洲縣)은 본래 거로현(巨老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명진현(溟珍縣)은 본래 매진이현(買珍伊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른다. 남수현(南垂縣)은 본래 송변현(松邊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복고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당시 신라의 행정구역
'독로국은 왜와 국경을 접한다'라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서 알수 있듯 삼한시대뿐 아니라 가야시대 독로국은 대왜 교류가 활발한 국가였다. 이는 거제지역에서 발견된 고분 유적과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분 발굴과 유물출토는 그 자체가 역사다.특히 가야와 같이 역사 기록이 부족한 시대는 고분과 유물의 특징으로 시대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제지역에서는 3세기 독로국 유물의 발굴은 미흡하지만 4세기 가야시대 유물부터 6세기 신라와 가야의 병합, 7세기 통일신라 지방 편제의 흔적이 거제 곳곳에 남아 있다.지역에 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