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그해 11월 고현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맨 먼저 고현과 용산 들판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고 성 안에는 포로를 감시하는 경비병 막사를 지었다.이 사진은 1951년 3월 유엔군 홍보실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앞부분 초가집이 많은 곳이 서문마을이다.당시 고현성 주변에 마을이 있었다. 고현성 서쪽 성문 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서문(西門) 마을이라 한다. 포근한 초가집 주변에는 전답이 계단처럼 있고, 초가집 마을 너머로 함석지붕으로 된 막사가 있다.이곳은 고현성 안쪽으로 포로 경비막사
1970년 7월13일 거제시 장목면 시방리에서 촬영한 대장간 모습이다. 대장간은 풀무를 차려 놓고 쇠를 달구어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드는 곳을 말한다.대장간에서 담금질로 쇠를 달궈 농기구를 비롯해 칼·곡괭이 등 각종 연장을 만드는 장면이다. 흙과 돌로 쇠를 달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그 속에 숯불을 넣어 놓고 풀무질을 해서 쇠를 벌겋게 달군다. 풀무질은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이 있고, 또 발로 밟아서 불을 붙이는 풀무가 있다.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었다. 대장간에서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쇠로 된
설에는 비가 오고 눈이 와야 좋고, 보름은 맑고 밝아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했다.음력 정월 15일은 대보름날이다. 농경문화 시대는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각종 민속행사를 비롯해 한해의 액땜을 한다. 첫날 첫 달부터 좋은 일이 많고 편안해야 그 해를 잘 보낸다고 해서 액을 물리치는 비방도 하고 몸을 근신한다. 대보름날은 설·추석 다음으로 큰 명절이다. 지방에 따라 다소 다르긴 해도 지신밟기 농악·줄다리기·널뛰기·자치기·연날리기·윷놀이 등의 민속놀이와 용왕제&
포로수용소 구석진 곳에서 포로들이 같은 동료를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하는 광경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사나이는 십자가 대신 철조망을 뒤로하고 양팔과 다리를 벌린 채 손발이 묶여 있다.그 앞에 인민위원장인 듯한 사람이 지휘봉 같은 막대기를 들고 서 있고 좌우로 몽둥이와 대창을 들고 여럿이 둘러 서 있다. 그리고 예리한 칼날을 든 사람도 보이고 돌멩이를 든 사람도 보인다. 철조망에 묶여 있는 사나이는 얼굴에 피멍이 들어 있고 옷에 묻은 핏자국은 고문을 당한 듯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사진은 1971년 10월 초순이다. 당시 농가에서 가장 귀중한 필수품이었던 '가마니 짜기 대회'가 거제면 서정리 마을 앞 논에서 열렸다.이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주머니와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 등 각 읍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옆에는 구경꾼들이 늘어섰다.가마니는 곡식을 담는 포대로 사용했다. 볏짚으로 새끼를 꽈서 가마니틀에 줄을 매어 놓고 두 사람이 조율을 하면서 가마니를 짠다.가마니 짜는 틀을 사랑방이나 헛간에 설치 해 놓고 밤을 새워 가면서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는 곡식을 넣는 포대로 사용하지만, 뚝이 무
장승포항 앞에 파도를 막고 서있는 섬이 지심도다. 동백꽃이 많이 핀다고 동백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승포항과 가까이에 있지만 행정구역은 일운면 옥림리에 속해 있고, 생활권은 장승포다.지심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70년 3월. 문화유적지 조사차 장승포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섬에 내렸다. 승용차가 다닐 정도의 길이 나 있고 포장이 돼 있었다. 길가에는 한 아름이나 됨직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섬 중간 지점에는 일본식 기와집들이 있다. 그 집들은 1936년 일본군 육전대가 주둔하면서, 300여명의 군인들 숙소와 일본인이 살
1983년 8월6일 지방문화재 자료33호로 지정된 아양리 삼층석탑(鵝陽里三層石搭)은 대우조선소가 들어서며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나 인근인 현 위치로 옮겨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현 위치도 대우조선소 안이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옛 절터 근방의 사찰인 장흥사로 이설해서,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를 알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옛날 옥녀봉 중턱에 신라시대 법률사(法律寺)란 절이 있었고, 그 지역에 이 탑이 있었다고 해서 이 지역을 탑골이라 했다. 탑골 절터 주변에서, 1935년 아양리 해변가 마을에 살던 박학
이 사진은 여자포로가 탈출을 하다가 유엔군 감시병에게 들켜 철조망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여자 포로수용소는 수월과 해명마을 사이 주작골 입구에 350여명의 포로가 수용돼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들로 구성된 여성들로 서울에서는 남로당 지하조직 여성동맹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한 여성들이다. 예전 1971년 6월25일 수월지구 제산마을 위쪽에 살고있던 여자포로를 만났었다. 보통 키에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그는 포로란 사실도 감추고 만나기를 꺼려했다. 여러번 시도 끝에 겨우 만난 그는 이옥희씨로 평양 출신이었다. 그에게서 여
위 사진은 1972년 아주·아양지역에 옥포조선소(대우조선소)가 들어오면서 이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조성된 능포마을 이주민 주택단지 조성 전경이다. 능포마을 남쪽 산 아래 밭과 산 일부를 택지로 만들었다.당시 대부분의 집들이 초가 3칸과 슬레이트 지붕이었던 것에 반해 이주촌은 벽돌을 쌓아 지붕에 색깔을 입힌 최신식 고급 주택이었다. 주택사이 길은 차가 한 대 다닐 정도였고, 계단식으로 층층이 집을 지어 전망이 좋게 한 이 집들은 당시 거제에서는 최신식 집들이었다. 정든 옛 땅과 집을 잃고 나온 이주민들도 새로운
1970연 9월11일 거제군수로 부임한 박희수 군수. 그해 12월 한 해의 마지막을 앞두고 거제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지역민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마을을 순시하고 있다.거제는 해안 지역이지만 일부지역 해안가에서는 농어업을 겸하고 대부분이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겨울이 되면서 한복차림을 한 여자들은 머리를 곱게 빗고 비녀를 찔러 흰 무명수건으로 목도리를 하고 있고, 남자들은 짧은 검은색 옷을 입고, 어른들은 머리에 탕건을 쓰고 있다.이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의식과 풍속이 조선시대 풍속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었다. 남녀노소 구별할 때라
거제면은 명산 계룡산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항구에 자리 잡은 거제의 중심도시로 조선 중기에는 거제를 통치하던 거제현의 치소지였다.농·어업을 위주로 살았던 이곳은 동쪽으로 노자산과 가라산이 감싸고 있고, 서쪽으로 산방산이 필봉으로, 성파 선생을 비롯해 문필가가 많이 났던 곳이다. 계룡산 아래는 구슬처럼 생긴 산이 있다. 이 산이 옥(玉)같이 생겼다고 해서 옥산금성이라 한다.그 산 아래 거제면이 자리 잡고 있다. 바닷가에 양반이 갓을 쓰고 앉아서 풍월을 하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 있다. 이 산을 갓 산이라 했는데,
1969년도 촬영한 장승포 항구다. 당시 아늑한 항구마을로 초가집과 함석집·기와집이 있었다. 마을 앞 항구로 차가 겨우 다닐 정도의 길이 나 있고, 집 주변에는 텃밭이 있다. 아늑한 시골의 바닷가 마을이다.장승포로 이름 한 것은 해성고등학교 올라가는 도로 중간에 고목나무가 있다. 이 나무 아래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장승이 서 있는 곳이라 해서장승거리라 했다. 이 장승거리가 장승포가 됐다.1889년 한일 통어조약이 된 후 일본이 우리나라에 고기잡이로 올 수 있었다. 1906년 태전종차랑(太田種次浪)이 입주해 입좌촌이
1971년에 촬영한 장승포에서 두모로 넘어 가는 고개 왼쪽 산쪽에 있는 능포 마을이다.능포란 이름은 바닷가 두모로 넘어 간다는 곳에 있는 마을이란 어원으로, 넘어에 포구가 있다고 해서 넘어 포구가 '넘어개'로, 이 말이 다시 '능개'라 했다. '개'란 말은 경상도사투리로 포구를 말한다. 능개를 한문으로 이름 하면서 개를 포라 해 '능포'가 됐다는 말과, 장승포와 두모 포구 중간에 있는 양지쪽 마을로 풀이 말라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른풀 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1970년 이전만 해도 어선을 비롯해 여객선 일부도 나무로 만든 목선을 이용했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선(渡船)도 노 젓는 목선이었다. 돛단배를 비롯해 발동선·통통배 등.거제도 역시 해안선 곳곳에서 목선을 만들었다. 1980년 중반까지도 여러 곳에서 배를 만들고 수리했다. 부산·마산으로 다니는 여객선도 대부분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다.거제도는 당시 섬 곳곳 높고 낮은 산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민둥산으로 목선을 만들 만한 나무가 없었다. 동부와 고현에 제재소가 한 곳씩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강원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봄이 되면, 춘궁기(春窮飢)라 해서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이 때가 벼농사를 지어 겨울을 지내고 나면 양식은 떨어지고 보리가 익을 때까지 지낼 양식이 없어서 살아나기 가장 어려울 때였다.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했고,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며 사는 시기라 해서 춘궁기(春窮飢)란 말이 생겼다.보릿고개가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인지 그때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굶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시기를 넘기던, 배고픈 고개다. 이 고개가 가장 넘기 힘든 시기였다.이 시기의 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거제군이 1914년 통영의 용남군에 통합됐다. 이후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서면서 거제군으로 복군해야 한다는 정부시책에 따라 1953년 1월22일 거제군으로 복군돼 그해 5월27일 장승포에서 개청식을 가졌다.초대 조창재 군수 외 10여명의 직원이 장승포심상고등소학교(현 장승포초등학교)에 임시 청사 현판식을 하고 총 51명의 직원으로 거제군 행정을 보게 됐다.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되고 난 후 장승포에서 3년간 있다가 1956년 10월30일 옛 거제현의 소재지인 고현으로 거제군 청사를 이전했다.
1973년 10월11일 옥포조선소(대우조선해양) 기공식이 있은 후부터 옥포와 장승포 지역이 크게 발전되기 시작했다.장승포는 1889년 한일 통어조약이 있은 후부터 일본인이 정착해 어업도시로 발전시켜 놨던 곳이다. 1938년 10월1일 통영군 이운면 장승포읍으로 승격했다가 1987년 1월1일부로 일운면 옥림리 일부가 장승포로 편입됐다.장승포·옥포·아주 지역이 급진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자, 이 지역을 장승포시로 출범시키기 위해 1987년 1월21일 당시 백승두 군수 때 장승포읍 지역을 거제군 장승포출장소로 개소
거제시 사등면 성포항은 대리마을 뒤 산 망산이 북으로 내려온 작은 봉우리에 조선 중기에 축성한 성이 있다. 성이 있는 항구라 해서 성포항이라 했다. 마을 앞은 가조도 섬이 있고, 섬사이로 부산·마산·통영·여수 등지로 다니던 여객선 부두가 있었다.거제대교와 거가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이곳이 거제 관문 역할을 했다. 성포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어업과 상업도시 형태로 신흥도시처럼 발전했다. 조선 말기에는 돛단배로 통영·고성·마산·부산·여수 등지로 다녔고
1980년경 거제면 산달도에서 여자예비군이 처음 창설됐다.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자 예비군은 1989년 서해 최전방인 백령도와 대청도에서 군인 가족을 중심으로 여성예비군이 창설됐다고 한다. 내륙지역으로는 최초로 창원시 직장 여자예비군 소대가 창설됐으며, 1999년 강원도 인제군청 여자 예비군 소대, 2004년 3월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여자 예비군 소대, 2005년 3월 강원도 양양군 여자 예비군 소대 등 6개 지역에서 창설됐다는 기록이 있다. 거제면 산달도의 예비군은 그 보다 앞서 자체적으로 창설됐다. 거제는 고려·
장평은 비옥한 넓은 들이 있던 바닷가 마을이었다. 농토와 바다가 있어서 농어업으로 살기 좋았다. 농업과 어업을 위주로 하면서도 농한기를 이용해 대바구니를 엮어서 팔았다.들 좋고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이 풍부한 이곳에서 왜 대바구니를 만들어서 팔았을까? 대바구니가 장평의 특산품으로 알려질 만큼 집집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바구니를 만들었다. 매년 한 두 번씩 대바구니 엮는 시합도 했다.이 사진은 1971년 삼성조선소가 들어오기 전이다. 마을 앞 따뜻한 양지쪽에서 정월보름날 보름달처럼 밝고 둥근 대바구니를 엮어서 팔아 복을 받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