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몰락의 원인이 된 오빠 양국충은 겨울이면 수십명의 미인을 발가벗겨 죽 둘러앉히고, 그 속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를 육병(肉屛)이라 한다. 남당(南唐)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손성(孫晟)은 밥 먹을 때 음식을 소반에 얹지 않고 수십명의 나체 미인들에게 들고 있게 해 먹었다. 이를 육대반이라 한다. 당대 부자들이나 권력자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다. 한때 일본의 퇴폐풍조였던 '알몸 스시'의 원조쯤 되려나.동양에서의 나체는 불경스럽고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서양은 좀 다르다. 나체촌도 있고 누드비치도 있다. 이런 전통은 이미
지구는 둥글다. 둥근 지구의 가로 중심선이 적도(赤道)고, 세로 중심선이 황도(黃道)다. 이때 황도와 적도가 교차하는 두 교점이 춘분점과 추분점이다. 천문학에서는 춘분점을 기점(0°)으로 황도를 따라 15도씩 이동하면 24절기가 생겨난다.춘분은 '봄을 나눈다'는 뜻으로, 밤과 낮의 길이가 역전되는 분기점이면서 추위와 더위가 같아지는 날을 의미한다. 춘분이 되면 제비가 날아오고, 산수유·생강나무는 노랗게 꽃을 피우고 산에는 진달래 꽃봉오리가 터질 듯이 부풀어진다. 농촌에서는 봄기운이 듬뿍 들어있는 들나물을 캐어 무치거나 국을 끓여 먹
누가 말하길, 70살이 넘으신 아버님께 "요즘 경로당에는 자주 가세요?" 했더니 "잘 안가!"했다. "왜요?" 했더니 "형님들이 자꾸 심부름을 시켜서"나이 70이면 십년을 한묶음으로 일곱번을 지났다고 해서 칠순(七旬)이요, 70까지 사는 일은 예로부터 드물다하여 고희(古稀)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에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나이인데도, 요즘 경로당에서는 70살 정도는 어른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젊은이 취급을 받는다.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노년에 자신을 소개할 때 "청년 이상재입니다
제나라 왕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화가에게 물었다. "어떤 그림이 가장 어려운가?" "개나 말입니다." "무엇이 가장 쉬운가?" "귀신이나 도깨빕니다." "왜 그런가?" "개와 말은 사람들이 잘 알기 때문에 진짜처럼 똑같이 그려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그리든 귀신을 닮지 않았다고 증명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귀신 그리기가 가장 쉽습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귀매최이(鬼魅最易)'의 고사다. 한비자는 이 고사를 통해 실체가 없는 허황한 공론이 오히려 쉽고 그럴싸하게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용
신라의 21대 소지왕 때 일이다. 정월 보름날 경주 남산 천천정(天泉亭)에서 산책하는데 까마귀가 왕을 보고 계속 울었다. 이상하게 여겨 신하에게 까마귀를 따라가 보라고 시켰다. 신하가 연못에 이르자 물속에서 백발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주면서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하고는 사라졌다.일관이 "둘은 일반사람을 말하고, 한 사람은 왕을 뜻하니 편지를 읽으소서"하고 권했다. 편지에는 '사금갑(射琴匣)'이라 적혀 있었다. '거문고집을 쏘아라'는 뜻이다. 궁으로 돌아온 왕은 활로 거문고 집을 쏘았더니 그 안에는 왕
신라시대 이후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은 음력 1월1일 설이다. 그러나 설의 수난은 1895년 갑오개혁 때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채택하면서 시작됐고,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면서 본격화 된다. 양력설은 '신정' 음력설은 '구정'이라 불렀다. 신정은 신문명이고, 구정은 구시대의 낡은 풍습이라 폄훼했다.1930년대는 아예 대놓고 탄압하던 시기였다. 음력설이 오면 떡방앗간은 문을 닫아야 했고, 설빔을 차려입고 나오면 먹물총을 쏘았다. 순사는 어느 집에서 음력설을 쇠는지 조사하러 다녔고, 고향을 찾는 사람은 요시찰인물로 감시했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윤극영(1903~1988) 선생의 동요 '설날'은 어렸을 때 설날 지정곡과도 같았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왜 '까치설'인지, 까치도 설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까치설'을 사전에서는 '어린아이의 말로 설날의 전날 곧 섣달그믐날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해 놓았다.정월 초하루는 '진짜설'이고, 섣달그믐날은 '가짜설'이기 때문은 아닐까? 까치와 가짜는 발음이 비슷하다. 설이 되면 가장 마음 설레는 것 중 하나가 새 옷이고, 새 신발이다. 이를 '설빔'이라 하는데 설
설날이 되면 아침에 차례를 지낸 후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올린다. 세배를 받은 사람은 덕담(德談)을 해준다. 새해 아침에 복을 빌고 좋은 말을 들려주면 일 년 내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생긴 세시풍속이다. 세배를 드리고 나면 떡국으로 마련한 세찬(歲饌)을 먹고 어른들은 세주(歲酒)를 마신다.섣달그믐에 하는 '묵은 세배'와 정초(歲)에 하는 세배가 있다. 세배는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인사이며 한 번만 해야 하고, 누운 사람이나 아픈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다. 절은 하는 사람뿐 아니라 받는 사람도 예의를 갖춰야 한다.
섣달그믐에는 풍습이 많다. 그중 하나가 집 안팎을 청소하는 일이다. 평소에 손이 가지 않았던 마루 밑에서 개가 물고 간 신발 한 짝이 나오고, 옷장 구석에서는 찾아도 없던 목수건이 나오고, 더러는 주머니 속에서 돈이 나와 횡재하기도 한다.집안 대청소는 고대부터 해오던 관습이다. 새롭게 시작하려면 묵은 것을 치움으로 에너지의 흐름을 터준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집 청소뿐만 아니라 설이 되기 전에 하는 목욕도 같은 의미였다. 목욕은 명절맞이 연중행사였다.목욕(沐浴)이란 '머리 감고(沐), 물로 몸을 씻는(浴) 일'을 말한다. 몸이 깨끗해
2024년은 갑진년(甲辰年) 용띠해다. 십간의 오방색이 푸른색이라 청룡(靑龍)이다. 우리 민속에서 십이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상상의 동물로 힘과 권위의 상징이며,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만물의 근원인 물을 관장하는 수신(水神) 곧, 물의 정령이다.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노라는 유언을 남겼다. 681년 7월,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동해 큰 바위섬에 장사지냈다. 그곳이 지금의 감포 앞바다 대왕암이다.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여 감은사(感恩寺) 절을 지었다
1969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제6차 개헌 때 일이다. 야당이 국회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자 여당은 다음 날 새벽 2시, 국회의사당 별관에 기습적으로 모여 6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때 희한한 장면이 연출된다.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의사봉이 없었다. 이효상 국회의장은 급한 김에 주전자가 뚜껑으로 책상을 세 번 두들기며 가결을 선포했다.요즘도 주주총회나 의회에서 안건통과를 두고 부결 쪽 사람들은 의사봉을 뺏으려고 난리를 친다. 그럴 때 보면 망치를 안 치면 안건통과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음력 11월은 동짓달이다. 동지(冬至)가 든 달이기 때문이다. 한자어로는 '겨울에 이르렀다'라는 뜻이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 동지가 지나면 해가 노루꼬리만큼씩 길어지기 시작한다.낮은 양(陽)이고 밤은 음(陰)이다. 따라서 밤이 긴 탓에 음의 기운이 가장 세고 반대로 양의 기운이 가장 약할 때다. 동짓날에 팥죽을 먹는 것은 양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함이다. 이날 먹는 팥죽을 '동지두죽(冬至豆粥)'이라 한다. 붉은팥으로 죽을 쑤고 찹쌀가루로 둥글게 빚은 새알심을 넣는다. 새알심은 나이 수대로 넣어 먹었다.'동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한 건물과 넓은 정원으로 유명하다. 밤이 되면 여기서 연회가 자주 열렸다. 그런데 당시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초대받은 귀족들은 개인용 변기를 가지고 갔다. 밤새 술과 음식과 춤으로 놀다 보면 어느 틈에 변기가 차게 되고 그러면 으슥한 화단 아무 데나 버렸다.아침에 정원사들이 청소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 정원사가 묘안을 냈다. 오물을 한곳에 모으기 위해 '저쪽에 버리세요'라는 팻말로 안내했다. 그 팻말을 '에스띠끼에(Estiquier)'라고 하는데, '에티켓'의 어원으로 보고 있다.다른 하나는 베르사유
한 사업가가 바닷가를 지나던 중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놀고 있는 어부를 보았다. 사업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왜 고기는 잡지 않고 놀고 있지요?""오늘 잡을 만큼 잡았습니다." "아니, 더 잡으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잖아요." "그래서 뭐 하게요?" "돈이 많으면 좋은 배를 사고, 배가 좋으면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지요." "그래서 뭐 하게요?" "부자가 되지요."그러자 어부가 되물었다. "부자가 되면 뭐 하게요?" "전망 좋은 바닷가에 집을 짓고 편안하게 놀며 삶을 즐길 수 있지요." 어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술 먹다가 늦으면 집에 가서 한잔하자며 술친구를 데리고 오면 잠들었던 아내가 일어나 술상을 봐준다. 지금이야 아내가 술 취해 들어오면 남편이 얼른 약 사러 나가야 하고, 나갔다가 동네약국이 문 닫았다고 그냥 왔다가는 간 큰 남자가 되는 요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여간 간 큰 남자가 아니면 휴일이라고 하루종일 소파에 드러누워 TV보기도 힘들다. 아내가 연속극을 보고 있는데 야구를 보려고 채널 돌리는 건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일이고, 아내가 연속극 볼 동안 집안일하고 청소기 돌리고 세탁기
남자다운 남자를 일컬어 '상(上)남자'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은 일년 열두달 가운데 음력 시월을 '신성한달' '좋은 달' '으뜸달'이라 해서 '상(上)달'이라고 했다.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상달은 10월로 일 년 중 농사가 마무리되고 햇곡식과 햇과일을 수확하여 하늘과 조상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기간이다'고 했다. 그래서 시월이 되면 나라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세시풍속으로 바빴다.예전에 나라에서는 추수감사제의 성격인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 같은 국행제(國行祭)의 흔적이 정월 보름이나
나이가 들어 혼기를 놓친 딸을 두고 글자깨나 읽은 유식한 부모는 '과년한 딸자식'이라고 말한다. 국어사전에 '과년하다'를 '여자 나이가 혼인할 시기를 지나다'라고 풀이한다. 그 말은 '여자는 혼인하기에 적절한 나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결혼도 선택이라는 시대에 바람직한 표현이 못 되는 것 같다.과년(過年)과 다르게 과년(瓜年)이 있다. 나이의 이칭(異稱)으로 전통적으로 일반 여염집에서 쓰이던 말이다. 과(瓜)는 '오이'를 뜻한다. 나이에 있어 과년(瓜年)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첫째, 과(瓜)자를 파자하면 팔(八
"나는 정의의 기사다."서구문학에서 가장 널리 읽힌 고전작품 중 하나인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에 나오는 말이다. 기사 이야기를 읽고 환상에 빠진 돈키호테는 기사가 되어 악당들과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종자 산초와 늙어빠진 말 로시난테를 타고 여행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그 무더운 7월 한여름에 철갑옷을 입고 어느 주막집에 도착해 소란만 일으키자 주인은 빨리 쫓아낼 생각으로 그가 원하는 기사 임명식을 하게 된다. 그의 이상한 행동은 그렇게 시작된다.기사(騎士·knight)라고 하면 여성
1614년 이수광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 문화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峯類說)'에 고추를 일본에서 전래한 왜겨자(倭芥子)라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감기가 들면 술에 고춧가루를 타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17세기에는 고추가 이미 우리생활에 널리 쓰인 것 같다.고추는 약 9000년 전부터 멕시코 원주민들이 먹었던 식물이었다. 이후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됐다. 일본은 1542년 포르투갈 사람에 의해 전해졌고,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때 들어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민간요법으로 감기에는 '소주+고춧가루'라는 이야
솥은 날 것을 익히는 주방용구로 밥을 짓거나 국 또는 물을 끓이는 데 사용한다. 쌀을 비롯한 식재료가 솥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딱딱하던 것이 부드러워지고 먹기 힘들었던 것이 먹을 수 있도록 변화되는 것을 보고 부정한 관리를 가마솥에 삶아 세탁시키는 처벌의 형구가 되기도 했다. 이를 우리 말로는 '솥찜질'이라 하고, 한자어로는'팽형(烹刑)' 또는 '자형(烹刑)'이다.조선 성종 때 노사신이 쓴 '동국여지승람'에 '관원으로서 직책을 더럽힌 독직(瀆職)한 자를 이 다리 위에서 삶았다'고 했는데 이 다리는 지금의 보신각 옆 서울 광화문우체국